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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張俊河 失足死의 유일한 목격자인 前職 고등학교 교감 金龍煥씨

마당쇠행정사 2012. 8. 17. 06:38

張俊河 失足死의 유일한 목격자인 前職 고등학교 교감 金龍煥씨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활동기한 연장을 위해 張俊河 선생님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 자신들의「밥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내 인권을 짓밟고 있다』
 
『張俊河 선생님은 정권에 의해 타살되지 않았더라도, 살아 생전에 남긴 업적으로 충분히 위대한 분입니다. 선생님을 있지도 않았던 의문사로 몰아붙이는 일은 그분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그가 인터뷰에 응한 이유
1967년 5월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수감됐다 24일 만에 출감하는 張俊河씨 (당시 신민당 동대문乙 국회의원 후보).
 지난 6월28일 오후, 月刊朝鮮 편집부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젊었을 때는 대단히 호남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노인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다. 그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委)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의문사委의 주선으로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소재 약사봉 등반길에 사망한 故 張俊河(장준하)씨의 미망인인 金熙叔(김희숙·79)씨를 만날 예정이었다고 한다. 『김희숙씨가 몸이 불편해 나올 수 없다』는 의문사委의 연락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문사委에 갔다가 헛걸음하고 집(충남 당진)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의문사委는 「張俊河 사망사건」을 의문사로 규정, 조사를 벌였으나 1기·2기 의문사委 모두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張俊河 사망사건」이 거론될 때마다 언론에 「金모씨」로 등장하는, 당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이 노인 金龍煥(김용환·69)씨다. 운명의 그날 金씨는 선생님으로 따르던 張俊河씨와 약사봉을 등반했다.
 
 『張俊河씨의 죽음에 국가 공권력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金씨가 중앙정보부의 사설 정보원이거나, 죽음을 목격하고도 국가 공권력이 두려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張俊河 타살」을 입증하는 의문사委의 2년에 걸친 조사와 자료수집, 사고현장에서의 추락 시뮬레이션은 「목격자 金龍煥」이라는 벽에 번번이 부딪혔다.
 
 金씨는 1967년 7代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한 張俊河씨를 도우면서 인연을 맺었다. 張씨의 지구당(동대문乙구) 간사직을 맡는 등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일하다가 1975년 초에 낙향했다.
 
 기자는 약사봉 현장의 헬기 촬영 등 1기 의문사委의 「張俊河 사망사건」 조사가 한창이던 2001년 7월 金龍煥씨 인터뷰를 위해 충남 당진에 있는 그의 집을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고, 대신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밤이 깊도록 그는 하소연을 했다.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그의 하소연 가운데 몇 번이고 되풀이 되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張俊河 선생님은 약사봉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추락하셨고, 그래서 돌아가셨다. 그걸 내가 현장에서 봤다. 무얼 더 얘기하라는 것인가』
 
 金씨는 다음날 아침 집을 나서는 기자에게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놨더니 어쨌든 후련하다』고 했다. 기자가 그에게 한 말은 『그러시다가 홧병 나시겠습니다』였다.
 
 金龍煥씨를 다시 만난 것은 1기 의문사委의 활동이 마무리되던 무렵인 2002년 여름이었다. 그는 손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의문사委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격분, 책상을 내리쳤는데 손에 금이 갔다는 것이다.
 
 그와 차를 마시며 『이번에는 인터뷰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 사건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지하에 계신 張俊河 선생님도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累(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는 이유였다.
 
 金龍煥씨는 月刊朝鮮 1993년 6월호에 실린 「죽음으로의 下山, 그 뒤」 題下(제하) 手記(수기)에서 심정을 다 밝혔고, 그 이상 새로 나올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에는 張俊河씨의 국가기관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 SBS의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誤報(오보)를 지적한 기사가 실렸었다─편집자 注)
 
 그러던 그가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 응하기로 한 것은 의문사委의 조사를 받으면서 느꼈던 울분과 함께 「張俊河씨 사망사건」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정부기관 및 일부 인사들의 행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月刊朝鮮 1993년 5월호에 실린 金龍煥씨의 手記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자 注」가 실려 있다.
 
 <월간조선은 金龍煥씨의 수기를 게재하면서 그의 사진을 함께 실으려 했다. 이미 그의 이름과 직업이 공개됐기 때문에 그의 얼굴도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金씨는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결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金씨는 사진 게재를 한사코 거부했다. 사건 발생 18년 후나 29년 여가 지난 지금이나 그의 주변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그가 더 늙었고, 세상의 의혹에 대응할 기력이 점점 약해진다는 것뿐이다.
 
 
 『張俊河 선생님 사건은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요』
 
 지난 7월8일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가 가져온 검은색 가방에는 각종 자료들이 수북했는데 자신에 대한 잡지 및 신문 기사와 法典(법전), 그리고 약봉지가 담겨 있었다.
 
 ―法典은 왜 갖고 다니십니까.
 
 『틈틈이 법에 대해 공부하려구요. 의문사委라는 게 초헌법적 기구거든요. 그 문제점을 공부하고 있어요』
 
 ―어디가 편찮으셔서 약을 먹는 겁니까.
 
 『1기·2기 의문사委 합쳐서 한 30번은 제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의문사委에서 출두 통지서가 오면 출두할 때까지 1주일이건 보름이건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겠어요? 죽을 지경이죠. 혈압도 있는데다가 요즘은 손이 저려서 약을 먹고 있어요』
 
 ―30회 이상 조사를 받아야 할 만큼 진술할 내용이 많습니까.
 
 『그 사건이 복잡한 것도 아니고 단 1분, 아니 몇 초만 이야기하면 끝나는 거예요. 내 생각에는 10분이면 조사가 끝나요. 그렇게 길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반복에 반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의문사委에 자꾸 출두를 하십니까.
 
 『자꾸 출두를 요구하니까. 그리고 나는 떳떳하니까. 내가 숨기는 게 없으니까. 조사를 받으면서 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다 하다 더 조사할 게 없으니까 내 뒷조사를 다 했어요. 가족 사항, 친구 관계, 軍생활까지. 도대체 내 가족 사항과 張선생님 사망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의문사委가 金선생님에게 자꾸 출두 요구를 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들의 조직 수명 연장을 위해서예요. 공명심도 있겠죠. 張선생님 사건 만큼 의문사委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데 더 좋은 사건이 어디 있겠어요? 의문사委의 사무실에 가 보세요. 1기 때보다 2기 때 인원이 훨씬 더 늘었어요』
 
 
 3기 의문사委가 출발해도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3기 의문사委의 출범이 확실시되고 있는데요.
 
 『그게 문젭니다. 그런다고 張俊河 선생님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안 나오리라는 것은 의문사委 관계자들이 더 잘 알 거예요. 또 판정불능이 나올 거고, 그러면 또 張俊河 선생 팔아서 4기 하자고 그럴 건가…』
 
 ―3기가 출범하면 국정원, 기무사 등에 자료제출 명령권이 부여되는 등 의문사委의 권한이 강화될 것 같던데요.
 
 『권한이 강화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데. 난 차라리 국정원이 張俊河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면, 다 공개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사실도 없겠지만 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내 인생은 모두 정지됐어요. 떠나가시면서 나를 꼭 붙들고 가신 거예요. 이렇게 30여 년을…』
 
 金龍煥씨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올해 만으로 예순아홉입니다. 張선생님 사건으로 철든 후 내 인생의 ...

출처 : www.뉴- 박사모.com(대한민국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글쓴이 : 아름다운 자연의 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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