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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 유치 신청에 열정을 바치고

마당쇠행정사 2009. 10. 23. 05:59

    

88서울올림픽 유치 신청에 열정을 바치고

빨간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공군제9대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1979년 1월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으로 등원해 상임분과위원회 국방위원회에 배속됐다. 원내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지만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서 스포츠 외교에 일익을 담당했다.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면서 조상호 의원과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어느날 박종규회장이 10여년의 대사 외교적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스포츠 외교에 성과를 내보자며 영어에 능통한 조상호 의원과 나를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옹립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 이사회에 출석한 첫날부터 나는 크게 실망했다. 우리나라의 첫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그것도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 낸 손기정 옹에 대한 예우가 전연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회의가 열리자 마자 나는 손기정 옹에 대한 예우를 강조했다.

“손기정 선수는 식민지 시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이자 우상이였습니다. 비록 일본 선수로 출전하긴 했지만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스포츠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에 대한 예우가 없으니, 우리 스스로 면구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손기정씨를 대한체육회의 명예고문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합니다.”

명예고문이야 손전히 이름만 걸어 두는 상징적 존재다. 그래서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처 그 깊은 뜻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손기정 옹은 명예고문으로서 대한체육회의 상징적 얼굴이 되었다.

1979년 9월초 대한체육회 이사회가 소집되었다. 이 날의 안건은 서울 올림픽 유치 신청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들 우리가 올림픽을 주최할 수 있을까 하는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기는 힘들게 유치한 아시안 게임도 경제 및 안보상의 이유로 반납해서 태국에서 개최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10년후 1979년이라면 우리 국가 경제 발전 속도로 보아 자신을 가질 만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을 주최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공직 사회는 물론 언론 나아가 기업의 분위기였다.

체육회 이사들도 그런 고루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소극적이고 자기 냉소적인 반응에 참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언을 시작했다.

“88올림픽은 앞으로 10년 뒤의 일입니다. 그 때는 우리의 국력이 대단히 향상되어 있을 것입니다. 재작년에 벌써 100억 달러 수출도 달성(1977년)했고 매년 경제성장도 20%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가질 만하지요. 올림픽을 개최하면 국가의 브랜드 가치 향상은 물론 분단된 전쟁 상흔도 확 털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체육인들이 이 기회를 살려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유치의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러자 한 기업인 출신 부회장이 발언을 했다. “짐을 지고 갈 걸 지고 가야지요.아시안 게임을 반납한 것처럼 또 망신을 당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제11회 올림픽을 주최하기로 했으나 중.일 전쟁을 치르느라 기권한 적이 있는 사실을 적시했다.

“일본도 반납한  사실이 있는데 분단국가인 우리가 막대한 국방비를 쓰면서 어디서 그 돈을 마련한단 말입니까?”

이사 30명 모두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업인 부회장의 발언에 고대를 끄덕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물러설 수가 없었다.

“너무 우리 스스로를 낮춰 볼 필요가 없습니다. 신청한다고 해서 반드시 유치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니 일단 신청서를 내 봅시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요. 일본이 반납했듯이 우리 역시 여건이 되지 못하면 그 때 반납할 수 있잖습니까?”

 그래도 기업인 출신 이사들은 돈을 끌어들일 일이 난망하다는 뜻을 표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체육회장님이 대통령 각하를 직접 면담하고 그 때 다시 신청여부를 결정하면 어떻겠습니까?”

대통령까지 언급하는 데야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박종규 체육회장은 박 대통령이 혈육처럼 아끼고 신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활용해 보자는 것이였다. 또 대통령이 움직이면 이사회도 추인할 것이며 특히 체육인들이 탈락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지 유치만 된다면 누구보다 반기고 기뻐할 사람들이라고 믿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고 돌아온 박 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는 평소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해볼 테면 해 봐”하고 각하가 소극적으로 대답했으며 이런 표현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뜻이라고 설명을 했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 그 정도의 언질을 준 것은 적극적으로 나서보라는 뜻도 함의되어 있다고 설명을 했다.

“그럴까요?”

박종규 회장이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내 의지를 따랐다. 사실 박종규 회장과 나와는 사돈 간이어서 서로 어렵게 생각하면서도 암묵적으로 도울일이 있으면 먼발치에서 돕는 입장이었다.

“자 10년후의 일입니다. 그 때 우리나라 경제력은 대단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조상호 부회장과 잘 협의해 보시오”

나는 조상호 부회장과 해군참모총장 출신의 다른 부회장을 설득해 올림픽유치 신청의 불꽃을 당겼다. 올림픽 유치 신청 기간은 1979년 9월 30일까지 였다. 불과 보름 밖에 기간이 남지 않았다.

준비를 해 오지 않은 터라 시일이 다가오자 입이 바작바작 탔다. 나는 본시 계획을 세우면 밤잠을 안 자는 성격으로 늦은 밤에도 유치 신청 책임자를 불러 서류 작성 내용을 확인하면서 일을 진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청 최종 마감 날인 9월 30일 유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만약 그때 유치 신청을 유야무야 방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88서울올림픽은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정말 잘한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 박영수 서울시장이 올림픽유치추진위원회를 맡아 베이징과 나고야의 벽을 헤치고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실로 단군이래 최대의 업적을 쌓은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한국은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무엇보다 공산 국가인 소련이 참가해 선수단은 물론 이들을 인솔한 공식 비공식 인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했다.

한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깨끗한 거리 수준 높은 문화 품위 있는 질서 의식을 보고 공산권의 대표 주자인 소련의 사는 모양과 비교되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6.25 전쟁을 치른 페허의 나라 전쟁 고아의 나라로만 인식했던 한국이 성장 동력 엔진을 달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본주의 학습을 유익하게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결국 소련 붕괴 요인 중 서울올림픽도 그 하나가 됐다는 평가는 결코 헛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체육회 이사들이 우리의 저력을 과소평가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어둡게 보았지만 나는 10년 후의 일을 자신 있게 낙관했다.

“엽전이 뭘 해” 따위의 자기 비하나 자기 냉소에 빠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젖는 것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올림픽 유치 신청을 강력 주장했던 것이 코리안 드림을 키워 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유치에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한없는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