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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주사태에 왔던 북한군 증언`*******

마당쇠행정사 2012. 10. 15. 05:06

 

'광주사태에 왔던 북한군 증언'

 

조영환 편집인/지만원 박사 

 
지만원 박사가 시스템클럽에 게재된 “5.18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 6년만에 입 열다”라는 글을 통해 “16세에 북한군 특수부대에 입대하여 특수기술만 훈련하면서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19세 때 지휘관 호위병으로 5.18광주에 왔던 이야기를 또 다른 탈북자의 필력을 빌어 남한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첫 번째 증언”이라며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데 대해 이처럼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지만원 박사는 “글을 배울 나이에 인간기계로 훈련됐기에 그는 스스로 글을 쓸 능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데다 노무현 시절(2006)의 국정원이 ‘광주에 왔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는 협박을 원체 강력하게 받았고, ‘광주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보안각서’까지 썼기에, 우리는 지난 6년 동안 ‘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이 분당에 살고 있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했지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주 주변 산에 있으면서 고첩들이 가져다 준 빵과 고등어 반찬의 맛이 황홀했다”고 고백한 북한군 특수부대원이 입을 연 이유에 대해 “마침 같은 함경도로부터 탈북한 의협심 있고 필력 있는 탈북자 이원명이 사명감을 가지고 가명 김명국의 ‘광주참전기’를 꼼꼼하게 챙겨 세상에 내놓았다”며 “5.18광주 사태 당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국군 장병들과 시민들, 경찰들에게, 또한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국군 장병들과 애국적인 국민들에게 이 글을 삼가 드린다”는 탈북자 이원명씨의 맺음말도 강조했다. 지만원 박사는 “이리폭발사건, 아웅산 폭발사건도 김명국이 있던 특수부대에서 지질렀다는 증언도 여기 들어 있다. 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이 인터뷰 전문은 금년 3월 22일 작성된 것이지만 필자(지만원)는 4개월 후인 7월 20일에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원명씨는 “백주에 수백명의 남파간첩들이 광주거리를 활보하며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전차를 몰고 시가전을 벌렸었다. 이런 특대형 범죄행위를 당사자인 남한 정권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진실을 덮어버리는 이 나라 정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변기통의 물을 떠 먹은 기분’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괴이한 현상이 법치국가라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30년 넘게 활개를 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개탄했으며, 그 특수부대원은 “북한 군부에서 5.18광주사건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묘비를 세웠다고 하던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사실이야. 북한 군부는 광주 사건에 침투하였다가 사망한 군인들의 이름이 적힌 묘비를 북한 평안남도 평원군 원하리에 세웠다”라고 주장했다.

이원명씨는 광주사태에 투입된 북한군 특수부대원 출신의 탈북자에 대해 “5.18 광주 사태 참가자인 김명국(가명)이 증언하는 북한조선인민군 부대의 명칭과 사건 연월일, 참가자 이름 등은 모두 사실이다. 다만 본인의 요구에 따라 당사자의 이름은 가명을 쓰기로 한다”며 “그이(김명국)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 ○○○리 이다. 대한민국에는 2006년 7월에 입국하였다. 광주 사태참가자 본 당사자와의 인터뷰는 본인(이원명)이 그의 집에 찾아가 하였다. 그의 집은 서울 지하철로 1시간 30분가량 가는 성남 분당의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그는 북한회령에서 나와 한 고장 사람임으로 이미 전에 친분 관계가 두터웠다. 필자가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5.18 광주사태에 참가한 사실을 숨겨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북한군 특수부대원이었던 김명국(가명)씨는 “5.18 광주사태가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기만하며 진실을 오도 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 남한의 일부 정치 세력의 불순한 목적의 악용되는 것이 참으로 가슴 아플 뿐”이라며 “5.1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김일성의 전투명령을 받고 중앙당연락소(남파 간첩훈련소) 전투원으로 남한에 침투되었다.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던 남한 해방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사태의 참가자인 나의 증언이 잘못된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잡는 데 도움 되기 바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전에 여동생들이 한국에 먼저 오면서 대성공사 조사과정에 내가 5.18광주 사건 당시 남한테 북한대남 연락소 전투원으로 내려 왔었다는 것을 말했더구나. 대성공사에서 그에 대해 물어 보길래 내가 남한테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했지. 내가 광주사건에 참가하였다는 말이 나면 남한 사회가 복잡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공개하지 말 것을 부탁했댔어”라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고등중학교16살 때 중앙당 5과에 가는 사람들 신체검사한다면서 청진 도당 청사객실에서 1977년 8월 24일 신체검사와 최종담화를 중앙당에서 내려온 사람들하고 하였어. 나는 중앙당 5과에 간다는 것을 그때 그 사람들이 말을 하여서 알았다. 77년 8월 26일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 중앙당 대남 연락소에 입대하였어. 명칭은 112훈련소(아동훈련소)이야. 순안구역 구서리 라는 곳은 평성과 순안구역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어”라며 자신의 과거 거처들을 증언했다. 그는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 1977년 가을 남한 이리역 폭파사건이 우리 연락소에서 조직한 거야. 이리역 폭파 사건 때 3개 조가 파견 되었는데 우리 조장(이름 리상국)의 조만 살아남고 나머지 2개조는 폭약 실은 열차 다이야가 터지면서 미처 대피를 하지 못하여 죽었다고 조장이 말하더라”고도 증언했다.

김명국은 “1980년 5월 18일 날 야외 훈련하였는데 다 철수하라고 해서 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5월 19일 날 조장, 부조장들이 오전에 어디 갔다 오후에 돌아 왔는데 훈련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준비를 하라는 거야. 훈련장구류라는 것이 총탄300발, 수류탄2발, 권총과 카빈총1정, 단도, 포승 끈, 구급치료 약이었다. 식량은 미시가루 6일분, 말린 건 쌀 3일분(물에 타서 먹을 수 있게 준비된 것), 영양알약1달 분치를 준비하여 한국에서 지금 사용하는 등산용 배낭에 넣었다”며 “훗날 총화 때 알았는데 200명 정도 나왔다가 거의 다 죽고 살아 돌아 온 사람이 17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파견대장이 말하더라. 우리 파견대 대장 이름이 ‘문제심’이야. 현재 ‘문제심’은 북한 인민군 무력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어 일 하고 있어”라며 “한 개 타격대가 50명씩이니까, 4개 타격대에다 직속부대까지 합하여 남한에 나온 인원수가 200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야”라고 대답했다.

김명국은 “우리 떠날 때는 대장이랑 함께 20명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보다 먼저 떠난 것 같아. 후에 조장이랑 지휘관들이 말하는 것 들으려니까 우리 먼저 남한에 침투된 상태인 것으로 말하더라. 우리 조는 12명이랬어. 직속부대에는 3개조가 있었는데 우리조가 12명이고 3조는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16정찰에서 배속된 남한 전문가들이었다”며 “우리 조장이름이 ‘리상국‘ 이었는데 나이는 23살이고 고향은 함경남도, 함주군 사람이야. 아버지가 그때 함주군 인민병원 초급당 비서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조장의 이름은 ‘한광호’인데 나이는 22살이고 군사칭호는 소위였다. 고향은 어디라고 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조 성원들의 이름이 생각나는 사람은 ‘김일룡’(21), ‘최길산’(20), ‘황보석’(21), ‘한철수’(21)인데 훈련 나가게 되면 나랑 항상 같이 숙식을 하였기 때문에 생각나지”라고 대답했다.

김명국(광주사태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원의 가명)은 “5월 19일 오후 4시경에 대양리에서 갱생 트럭 6대에 직속 부대 50명 인원이 나누어 타고 떠났어. 우리가 도착한 곳이 내가 그때 듣기로는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바닷가 인데 어슬 어슬 한때니까 아마도 저녁9시 경이 된 것 같더라. 바다 쪽으로 보니까 부두에 배가 2척이 있더라”며 “조장들이 먼저 침실 점검을 하고 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군복을 벗고 각자에게 있는 사민 복을 입으시오! 라는 것 이었다. 조장은 조 성원들에게 자리를 잡아주고는 갑판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다 배에서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져 바다에 뛰어 들어 보니 물이 가슴높이 까지 차오르는 것이었다. 30m 정도 되게 기슭으로 바다 물을 가르며 나와 사방을 둘러보니 무인 지경 같아 보였어. 그날이 21일 새벽 2시경으로 기억이 난다. 우리가 배를 타서 2일간 바다에 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우리가 탔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었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어 있어”라며 상륙한 해안에 대해 “캄캄하니까 잘 모르겠던데 바다 주변에 울퉁, 불퉁한 바위가 많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나. 바다 주변에서 올라와 2명~3명씩 2시간 정도 은폐해 있었는데 대장이 조장들을 부르더란 말이야. 그 때 나는 대장 호위를 맡았으니까 대장 옆에 얼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알 수 있었는데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 하는 것 같더라. 그 들의 말을 들으니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후에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이 남한 쪽에서 마중 나온 길 안내자들인 것 같아”라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우리가 모여 있던 장소를 출발한 시간이 밤 2시경 됬어. 출발! 명령이 떨어져서 행군했는데 가면서 보니까 대 도로를 지나가고 과일밭, 야산들을 지나가던 생각이 나. 우리 조는 대장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니까 대장하고 직속 부대가 함께 출발하였는데 각 조별로 움직였다”며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고 하여 보니 도시 주변에 있는 야산이었는데 가까이 보이는 건물은 그리 높지 않은 2층, 3층 건물들과 땅, 집들이 보이더라. 멀리 보이는 데는 고층건물들이 어렴풋이 보이던 것이 생각난다. 그 때 조장이 ‘여기가 남조선 광주라는 곳인데 지금 광주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전투를 지원하기 위하여 왔다.’ 는 내용으로 말하더라”고 증언했다. 그는 “은폐했던 곳을 떠나 도시 가운데로 들어갔어. 오후 4시까지 2~3명씩 조를 무어 시내를 한번 돌았는데 지금 기어나는 것은 큰 건물 주변에 모래주머니로 쌓아놓은 바리케이트가 있었어”라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그 때 나는 ‘이 건물이 봉기군 지휘부가 있는 건물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이 들더라. 우리 대장이 그 건물에 거의 도착하니까 안에서 3명의 머리를 장발 기른 시민 복장차림의 사람들이 뛰어 나와 대장을 맞이하여 안으로 함께 들어가더라. 마중 나온 사람들은 이미 대장을 알고 있더라”며 “저녁 4시경에 조장이 오라고해서 한 장소에 가니 ‘오늘 수고하는데 빵이나 먹으라’ 며 음식 꾸러미를 우리에게 주길래 난생처음 빵이랑 한국음식을 먹어 봤다. 우리야 한 달 치면 거의 전투식량으로 살던 사람들인데 어쩌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게 잊혀 지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그는 “우리 조는 은폐한 상태에서 밤을 보내고 25일 다음날 오전 10시 경에 시내 쪽에 있는 도로에 나갔던 생각이 난다. 그 때 보니까 광주 쪽으로 들어오는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쌓아놓았는데 그 위에 총들을 기대놓았더구나”라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그 날 (25일) 저녁 5시경에 조장이 우리를 모이라고 하더니 전투정황을 설명해 주더라. 조장이 하는 말이 ‘우리 쪽(북한군)이 손실이 많다. 이제부터 어려운 싸움이 되겠는데 목숨 바칠 각오를 가져라’고 말 하더라.’ 그러면서 ‘지금 형편을 보니 우리가 살아 돌아 갈 수도 있고 잘못하면 여기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주 봉기자들의 대열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점점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 가고 있는데 함께 움직이지 못하고 흩어 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자기 맡은 임무대로 하여야 한다”며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는 대장의 호위를 맡았으니까 싸움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조들은 싸움에서 많이 희생 되었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대장만은 지켜야 한다. 대장이 잘못되면 우리도 다 잘못된다.’ 며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을 남기는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1단계는 한마디로 시위군중하고 협력하여 광주 봉기를 남한전체에 확대하는 것이고 2단계는 무장투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2단계라는 말을 해석하면 남조선에 제 2전선을 형성하여 북한에서 밀고 내려오는 기본부대와 협동작전을 하여 남조선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조장이 말하더라. 그 날도 조장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이 밥에 고기반찬이랑 먹던 생각이 난다. 유별나게 맛있던 반찬은 고등어 같은 반찬이야. 정말 맛있게 먹었어”라며 “그 때 대장의 옆에서 각지에 파견되었던 조장들이 보고 하는 말을 들으니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성과 보고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광주 쪽의 상공에서는 헬리콥터가 여러 번 순회 하면서 봉기군들을 향해 투항하라는 식의 방송을 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26일과 27일 새벽2시 까지는 있던 장소에서 머물면서 조장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조장이 숨이 차게 뛰어 와서 하는 말이 ‘긴급기동을 하여야 한다.’ 며 출발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며 “우리조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보니 아침6시경이었는데 무기를 휴대한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곳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고 뒤에서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나는 것이었다. 대장이 산으로 들어오는 봉기군을 마지막까지 맞이하여야 한다면서 있다나니까 국군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어”라고 증언했다. 그는 “그 때 우리 쪽에서 국군을 먼저 발견하였는데 우리가 위치한 200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봉기군을 포위하려 들어오던 특전사 부대원들이 수십명 정도 되게 불의에 나타나자 조장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사격하라’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성이 산골짜기를 메웠어. 나도 그때 3명의 국군을 쐈는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내가 속해있던 부조장이 책임진 6명(엄호조)은 국군과 그냥 총격전을 벌이며 견제하였고 조장이 데리고 있는 6명이 대장을 호위하여 산속으로 들어갔다. 5분후에 우리도 골짜기로 철수하였다”며 “다른 조들과 헤어지고 우리는 대장과 함께 13명의 인원으로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가로질러 가면서 타고 나갔었다. 주민가옥에는 절대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먹고 자는 것은 행군 도중에 잠깐 1~2시간씩 풀숲에 은폐하여 쪽잠을 자곤 하였다. 5월 30일 날 새벽에 우리조가 ‘문경고개’ 근처에서 행군할 때이다. 다른 방향으로 나갔던 부조장이 책임진 조가 돌아왔어”라고 증언했다. 그는 “휴전선에 도착한 때가 저녁 11시경이라고 생각된다”며 “도착하여 2시간 정도 기다리니 무력부 정찰국 소속 대원들과 3조 성원들 몇 명이 우리 조와 합류하였다. 휴전선 지뢰밭과 철조망은 정찰국 성원들이 앞서나가면서 해제하여 길을 개척하였다. 휴전선을 넘어서 보니 6월 5일 아침 9시 경이었는데 지역을 알아보니 북한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라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한참 걸어서 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떨어져 터지면서 우리 부조장(한광호)과 조원(017번)이 포탄에 맞아 즉사하였다. 사방에서 마구 포탄이 터지 길래 우리는 남한 국군의 포위에 든 것으로 알았었다”고 증언하면서 “우리가 남한 국군 복을 입은 것을 보더니 북한 포사격장 책임자되는 사람이 우리 대장과 무슨 토의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부조장과 조원의 시체를 가지고 부대까지 가려고 했는데 위에서 지시가 떨어졌다면서 이곳에 묻으라고 한다면서 시체들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장은 떠날 때 정찰국 대원들과 함께 갔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대장과 헤어져 더는 호위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나와 헤어지면서 ‘평양에 올라가 전투임무 수행보고를 하고 꼭 시간을 내서 병원에 찾아가겠으니 가서 치료를 잘 받으라’ 고 하는 것이었다. 그해 10월30일 태천 군관학교 가는 날까지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광주봉기의 북한군 침투 총화는 6월 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 하에 평양에서 하였다고 한다. 남한에 침투되었다 전사한 사람 모두에게는 공화국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분견대 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 사령부)작전부에 승급 배치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소좌급인 분견대장들에게는 대좌의 군사칭호를 수여하였다고 한다. 조장들은 7명이 살아 돌아 왔는데 각 군단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상위급 군사칭호를 상좌로 승격시켜 배속하였다고 한다. 조장들 7명 모두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고 한다”며 “이들 중에는 이미 전에 남한에서의 전투 공로로 하여 공화국영웅들이였는데 2중 3중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 명이 되었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후에 병원에 찾아온 조장에서 듣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김명국은 “정치위원이 그 때 나에게 하는 말이 광주봉기 참가로 하여 1010군부대가 인명손실이 크고 해산 명령을 하여 다른 곳에 있는 대남연락소들에 배속 되었다는 것이다. 전투 총화에서 김일성은 ‘평화 시기에 금싸라기처럼 귀중한 혁명동지들을 잃을 수 없다. 국가에서 수많은 투자를 하여 키운 귀중한 동지들이 희생된 것은 국가의 커다란 손실이다. 앞으로는 평화 시기에 남한에 침투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방향에서 하라.’며 명령을 하였다고 정치위원이 말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훗날 나는 ‘태천군관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다가 다리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교육과정을 소화하기가 힘들어 훈련강도가 낮은 강건 종합군관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2년 후 북한군 교도지도국산하에서 지휘관으로 군사복무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군사훈련과정에 허리와 손이 심하게 다쳐 손가락을 절단하는 데까지 이르러 더는 군사복무를 할 수 없었으므로 군대에서 제대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남한의 검찰과 경찰조사 기록 자료를 보면 경찰이 4명, 군인이 23명, 민간인이 166명이 광주사건당시 죽은 것으로 확인 됬어요. 신원 미 확인자가 12명이라고 조사기록에 나와 있어요. 북한에서 200명 정도에서 내려왔다 살아 돌아간 인원이 17명밖에 안된다고 하였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에 갔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김명국은 “나는 지휘관이 아니니까 그 내용은 잘 몰라. 대장을 호위하는 전투성원으로 조장이 지시를 주면 그것만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는 거야.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5.18광주사건에 북한군을 침투시킨 조직자이니까 알겠지. 대남연락소 내부 규정에는 전우가 죽으면 흔적을 없애려고 땅에다 묻어 버려. 마지막 남는 사람은 붙잡히게 되면 자폭하게 되어 있어. 만약 전우가 부상당해 대오의 행군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되면 죽여서 땅에 묻어버린다”고 대답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인 김명국(가명)은 “광주사태가 진압되면서 우리 부대는 모두 갈라졌는데 혹시 남한의 산속이나 도시 속에 숨어 있다가 훗날 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남한에 이미 전에 알고 있던 조직선과 연계하여 해외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혹시 남한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신분을 세탁하고 사회 각 분야에 잠복하여 지금도 간첩행위를 하고 있을지 몰라”라고 주장했고, 대필가인 이원명은 “북한 김일성의 명령을 받고 남파되어 1980년 5월 광주사태에 참가한 조선로동당 중앙당 연락소 전투원의 증언을 이것으로 끝마친다. 필자는 인터뷰한 글을 마감하며 해방 후 대한민국의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 잡아 올바른 국가관과 정체성을 세워주길 국민들에게 부탁드린다. 5.18광주 사태 당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국군 장병들과 시민들, 경찰들에게, 또한 이 나라를 지키고 있는 국군 장병들과 애국적인 국민들에게 이 글을 삼가 드린다”고 글을 맺었다. [조영환 편집인: 
http://www.allinkorea.net/]


5.18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 6년만에 입 열다(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5033&page=4
 
출처 : www.뉴- 박사모.com(대한민국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글쓴이 : 은 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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