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충(李達衷/霽亭公)의 선견지명(先見之明)
이달충(李達衷/국당공의 셋째 아드님)
1326년(충숙왕 13)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서 공민왕(恭愍王)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歷任)하였다. 1359년(공민왕 8)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호부상서로 있던 1360년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罷免)되었으나, 훌륭한 학자였으므로 1366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이 전횡하던 때에 그에게 주색(酒色)을 일삼는다고 공석(公席)에서 직언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뒤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1385년(우왕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제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공(제정공)께서 먼 길을 가신다하니 섭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이자춘(李子春/이성계의 아버지)은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와 있던 이달충(李達衷)이 다시 개성(開城)으로 떠나게 되자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이별주나라도 한잔 나누고자 아들을 데리고 이달충을 찾아온 곳이다.
이달충(李達衷)과 이자춘(李子春)은 각각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으로 맡은바 직분은 서로 달랐지만 마음이 잘 통하여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늘 각별(恪別)하였다.
그런 까닭에 재회(再會)를 짐작할 수 없는 이별을 애석해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앞날을 기약(期約)할 수 없는 세상인지라 이제 가시면 언제 볼 수 있을는지.. .. 제가 술 한 병을 가져왔으니 이별주나 한잔 하십시다.”
李子春이 쓸슬한 얼굴로 아들이 들고 온 술병을 내밀었다.
“허허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인간사의 흔한 일임을 모를 나이도 아닌데, 공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허전 합니다. 그려”
李達衷 역시 李子春과의 이별이 애틋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李達衷은 본래 학식(學識)이 뛰어나고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여 벼슬길에 오른 이후 여러 임금을 모시는 동안 나라의 중직(重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였다. 또한 그는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자 한 잔 받으시오. 먼 길 조심해서 가시기 바랍니다.”
李子春이 李達衷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장군도 내잔을 받으시오. 부디 이곳에서 편안히 지내시길 바라오.”
이달충은 이자춘의 잔을 마시고는 다시 그 잔에 술을 채워 이자춘에게 권했다.
이자춘도 그 잔을 받아 기꺼이 들이켰다.
이자춘은 술잔을 비운 뒤 옆에 앉은 아들에게 말했다.
“뭐하는 게냐? 너도 어서 어르신께 술을 올려라”
“예! 아버지”
이자춘의 아들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이달충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어르신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비옵니다.”
그런데 술잔을 따르는 이자춘의 아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달충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자춘의 아들에게 큰절을 하였다.
아지춘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 또한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여 어찌 할 줄 몰라 얼른 맞절을 하였다.
“아니, 이공! 이 무슨 해괴한 짓입니까? 벗의 자식에게 절을 하다니요!”
이자춘이 놀라며 재발리 이달충의 몸을 일으켰다.
“허허 저는 당연하 해양 할 일을 햇을 뿐입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 어는 천지에 이런 얼토당토아니한 법도가 또 있단 말이오, 허허,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이자춘이 연신 당황하며 말했다.
“허허, 이보시게나, 이 장군! 이 장군의 아드님은 귀한 상을 지니 셨네. 앞으로 큰일을 하실 것이야. 그것은 지금 장군이나 내가 이루어 놓은 업적과는 비교도 안 될 일이지. 이처럼 귀하신 분이 술을 다라 주시는데 내 어찌 감히 앉아서 받을 수 있겠는가!”
이달충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자 평소 그의 선견지명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자춘은 말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서로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자춘의 아들은 그 기상이 더욱 늠름하고 패기 있어 보였다.
이달충은 이번에는 이자춘의 아들의 손을 꼭 잡더니 부탁을 하듯 간곡히 말했다.
“이보시게, 나는 늙었으니 아마도 자네의 좋은 날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네, 하지만 부디 지금 내가 한말을 잊지 말고 후일 그날이오면 내 후손들이나마 잘 보살펴 주시게나. 그리하면 내 비록 지하에 있어도 그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이렇게 말하는 이달충(李達衷)의 눈빛은 온화(溫和)하고 맑았다.
이별주(離別酒)를 나눈 이달충(李達衷)과 이자춘(李子春)은 서로의 안녕(安寧)을 당부(當付)하며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 온는 길에 이자춘은 아들에게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부디 저 어른의 말씀을 깊이 새겨 명심하거라!”
“예! 아버지!”
그렇게 대답하는 이자춘의 아들은 그로부터 20여년 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감행(敢行)하고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였다.
주(註) 이자춘(李子春)
1394년(태조 3) 태조의 4대조를 추존할 때 환왕(桓王)으로, 태종 때 다시 환조로 추존되었다. 조카 교주(咬住)가 장성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형의 천호(千戶) 관직을 이어받았으나, 후에 독자적인 체제를 굳혔다. 그는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附元)세력인 조씨(趙氏 : 이복동생의 外家)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 뒤 원나라의 정책으로 타격을 입게 되자 차츰 원나라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이른바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 하여 중서성(中書省)·요양성(遼陽省)·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해 호적을 작성하였다. 그 의도는 원주민을 우대하고 국외의 이주자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이는 이주민을 세력 기반으로 구축하고 있던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한편, 공민왕은 원명 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반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된 친원 기씨(奇氏)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한 이자춘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다.
이자춘도 대대로 구축해 온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1355년(공민왕 4) 공민왕을 찾아 복종할 뜻을 비치자, 공민왕은 그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였다. 이듬해 그는 유인우(柳仁雨)와 함께 동북면을 협공해 쉽사리 이 지역을 점령하고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가세해 뿌리 깊게 대립했던 조씨 세력을 제거한다. 또한, 이 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개경에 머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에 돌아가려 하자, 그 곳의 토착 기반을 이용해 공민왕을 배반할 우려가 있다며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해 다시 영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가 동북면에 돌아온 지 4년 만에 병사함으로써 조정 신하들의 염려는 기우로 끝났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성계는 통의대부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通議大夫金吾衛上將軍東北面上萬戶)가 되어 약관으로 정3품의 중앙무관직과 선조의 기반인 상만호의 두 가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이성계가 동북면의 토착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세력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다.
<友山 李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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