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感 時 漫 語

마당쇠행정사 2013. 8. 7. 06:11

感 時 漫 語

 

--- 省齋 李始榮 著 (初代 副統領) ---

 

 

1. 黃炎培(황염배)의 韓國史觀(사관)을 論駁(논박)함

 

緖言(서언)

 

癸酉年(1933) 여름 우연히 中國사람 黃炎培가 쓴 『朝鮮』이란 冊을 읽은 일이 있다. 그런데 그 文體의 거친 말투나 虛荒된 表現이 우리로 하여금 取捨選擇(취사선택)하여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本來 中國人의 韓國觀은 脫落(탈락)이 甚하고 仔細(자세)치 못한 部面이 常例(상례)인지라 滿淸(만청) 때에는 韓國事情에 關係되는 著書가 六, 七 種이나 있었으나 어떤 冊은 荒凉(황량)한 誤謬(오류)을 犯하거나 或은 不倫한 偏見(편견)으로 眞實에 어긋난 點이 많아 可히 볼만한 冊이라곤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黃氏의 글은 꽤 精力을 기울인 것 같으나 亦是 어긋나고 그릇된 點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韓國人이 볼 때에는 어는 編을 보더라도 黃氏가 日本人을 代身하여 日本을 宣揚한듯한 느낌이 들어 메스껍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이제 君子의 義理로써 그의 失策을 簡略하게 詰責(힐책)하고 나서 나의 管見(관견)을 덧붙일까 한다. 그러나 단연코 밝혀둘 것은 黃氏의 글을 評한다는 題目을 빌어 他人을 攻擊(공격)한다거나 나 스스로의 자랑이나 妄靈(망령)된 見解를 宣傳하기 爲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中國人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걱정 많고 多事多難한 時局에 處하여 이러한 값어치 없는 글을 玩賞趣味(완상취미)로나마 읽을 짬조차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可히 他山之石의 敎訓을 줄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붓을 들어 쓰기 始作한 글이요 이미 體系도 서지 않고 條理조차 缺한 글이 되었으니 너무 허물하지 말고 옳고 바른 것을 깨우쳐 주었으면 한다.

 

[註 1] 黃炎培(1879~1965), 中國江蘇星沙川縣出身. 日本에 留學 敎育學 專攻 江蘇省敎育司長 을 지내고 그 後 實利⋅實用의 民主主義敎育의 必要를 痛感하여 1917年 中華職業敎 育社를 創設 社長이 되었다.

 

1921年 北京의 軍閥官僚政府로부터 敎育總長으로 任命되었으나 就任을 拒絶하고 中 華戰爭 中애는 國民參政會 常任委員 民主同盟의 重鎭으로서 民主主義의 擁護에 盡力 하였다.

 

1945年 國共提携를 爲해 延安을 訪問하였으며 1948年 政治協商會議에 努力, 1949年 의 中央政權樹立 後 政務院 副總理 兼 輕工業部長으로 任命되고 그 後 民主建國會 主 任委員, 全國人民代表大會 副委員長으로 活躍하였음. 著書에 『延安歸來』와 『朝鮮』이 있고 本書에 痛駁하는 바는 『朝鮮』著書의 內容에 關해서이다.

 

[原文]

 

 

一. 駁黃炎培之 韓國觀.

 

癸酉夏. 偶讀中國人. 黃炎培氏所著 『朝鮮』一冊. 有無限感慨. 摛寫燕語. 以供病榻同人之裁擇焉. 中國人之韓國觀. 脫略不詳. 其來尙矣. 自滿淸季葉. 關於韓國事情. 而著書者. 有六七種. 然或蹈襲荒謬. 或偏見不倫. 爽實疎漏. 無可觀者. 就中黃氏所記. 頗費精力. 然亦多舛誤. 蓋取諸日人著作. 不可考究. 失其眞諦. 以韓人觀之. 一篇所擧. 不過代替日人而宣揚之. 頗感不滿. 今以責備君子之義. 略辯其失. 幷加管見. 不敢自認以十分正確. 然斷斷不是借題攻人. 以售誇妄之見也. 中國人士. 處此憂勞多事之秋. 此等不値小文句. 無暇供玩. 而其有助於他山之石. 或未可知也. 隨手漫墨. 旣無系統. 且欠條理. 閱者恕而斤正.

 

 

2. 檀君은 堯(요)임금과 幷立(병립)

 

近世에 國際慣用語로써 同文同祖와 共榮共存 또는 輔車脣齒(보거순치) 素敦睦誼(소돈목의)等 語句가 있다. 그러나 어찌 이러한 親密한 말들을 그릇된 表現이라 할 수 있으리오 마는 눈을 돌려 國際間의 實際問題를 直視하면 입으로는 꿀맛 같은 달콤한 말을 하면서 허리춤에는 匕首(비수)를 품어 있고, 災殃(재앙)의 原因이나 根本이 되는 씨앗을 품고 있는 冷酷(냉혹)한 外交家들도 곧잘 이런 말들을 使用하고 있으니 이제 이런 말을 하는 者는 하고 듣는 者도 無感覺하게 들어 한갓 外交上의 사탕발림 말로 알 뿐이지 조금도 感動하는 바가 없게 된 實情이다.

 

이제 내가 韓中 兩民族間에 眞實로 密接한 사이라는 表現을 阿諂(아첨)하는 뜻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문득 國際間의 慣用語(관용어)들을 듣고 이것이 心中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이 아니고 面前에서 꾸며서 하는 外交修飾辭(외교수식사)로서 헛된 形式으로만 外面致禮(외면치례)를 한 실속 없고 輕薄(경박)한 文面과 空虛(공허)한 儀禮(의례)라고 하여 이것을 破棄(파기) 할 것이 아닌 줄 안다, 도리어 韓中 兩民族間의 實際的 關係에 비추어 보면 歷代 祖先 以來 骨髓(골수)에 스며들고 肺腑(폐부)에 銘心(명심)해 둘 일은 서로 密接하고 가까워서 그 興廢存亡(흥폐존망)이 兩國이 잠시라도 分離(분리)해서는 숨을 쉴 수도 없는 形便이다.

 

이처럼 韓中 兩族의 關係는 일찍이 例를 볼 수 없었던 바라 이제 그 痕迹(흔적)을 遡及(소급)하여 살펴보면 저 아득한 四千年 前 우리나라의 檀君님은 陶唐(도당)의 堯(요)임금과 同時代에 임금님이 되시었고 그의 아들 扶婁(부루)는 夏禹(하우)와 「塗山(도산)의 會議」에서 만나 두 나라의 國境을 勘定(감정)하였으니 이것이 곧 韓中 兩民族이 和結(화결)하는 첫걸음이었다.

 

「神檀史(신단사)」라는 책에 虞(우)나라의 舜(순)임금이 攝政(섭정)했을 때 九州 十二山을 封했다고 했는데 朝鮮국의 西쪽 行政區域은 幽州(유주)와 幷州(병주)①가 모두 그 境內에 들어 있는바 朝鮮國도 使臣을 派遣(파견)하여 境界를 測量하여 幽州② 營州③의 二州를 朝鮮國의 領土로 하게 하였다고 했다.

 

 

[註 1] 옛 12州의 하나이며 帝舜有虞(BC2255~2208)은 冀州(기주)의 東南地方 恆山의 땅을 갈라서 幷州라 했다.

 

卽 河北省의 舊正安⋅保定 및 山西省의 舊大原 大同 等에 該當된다.

 

[註 2] 「幽州」舜虞는 冀州의 東北을 幽州라 하였다.

 

[註 3] 「營州」舜虞가 靑州(지금의 山東省)를 갈라 그 東北쪽을 營州라 하나 事實上 營州와 靑州는 同一한 땅이라는 說이 有力하다.

 

 

[原文]

 

二. 檀君唐堯之幷立.

近世國際上慣用語. 有同文同種. 共存共榮. 輔車脣齒. 素敦睦誼等旬. 何嘗不是表顯其親切之辭也. 然返觀實際. 口蜜腹劍. 實包禍胎之酷辣外交家. 亦常用此等語句. 是以言者言之. 聽者聽之. 毫無感念. 今不佞慾表現我兩民族間. 眞密眞切之意. 輒擧以上慣用之語. 竊恐聽之者. 或認以語不由衷之門面飾辭. 故破棄浮文虛儀. 直透實際. 歷擧祖先以來. 沁髓銘肺. 互相密邇. 其興廢存亡. 不可食息分離者. 未有若韓中兩族之關鎖結合也. 追溯其跡. 遠在四千年前. 東方始祖檀君與唐堯幷立. 遺其子扶婁於夏禹塗山之會. 勘定國界(神檀史云虞舜攝政. 封九州十二山. 朝鮮西鄙之幽州營州幷州. 咸列其中. 朝鮮派使勘界. 幽營二州屬之朝鮮) 此兩民族和結之初步也.

 

3. 倍達民族(배달민족)의 起源(기원)

 

지금 앞에서 擧揭(거게)한 倍達(즉 韓族이 檀木을 倍達이라 부른다)의 起源은 檀君의 開化로부터이고 韓中 兩族의 關聯된 歷史가 始作된다.

 

이 倍達族은 上古에 瀛海(영해)(濟州) 以北에서 小海(黑龍州)의 以南까지 九夷(「夷」는 大弓을 뜻하는데 韓族은 大弓을 잘 쏘는 民族이라는 뜻이다)로 分散(분산)해 살았다.

 

伏羲氏(복희씨)와 虞의 舜임금도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神檀記①에는 記載되어 있다.

 

4390餘年 前 神人이 太白山 檀木 밑에 天符三印을 갖고 사람과 萬物을 化育하시며 道를 펴시고 가르침을 세워 都邑을 建設하여 開國하니 國號를 朝鮮이라 했다.(朝鮮의 뜻은 朝日鮮明에서 由來한다)

 

五事(穀食⋅生命⋅疾病⋅刑罰⋅善惡)을 主管하시며 人間의 366事를 다스리시고 男女⋅父子⋅君臣⋅飮食⋅衣服⋅居處⋅編髮과 蓋首(女子가 婚禮 때 쓰는 帽子)의 制度를 制定하시었다(神人이 降生해서부터 建國하기까지 124年을 神市時代②라 稱한다)

 

匪西岬神后는 紡織하는 技術을 처음으로 勸獎 했으며, 太子 扶婁는 陶瓷器 굽는 일과 鑄物만드는 일을 맡아 그릇이나 道具를 만들었으며, 아들 扶蘇는 病⋅藥을 治하고 아들 扶虞는 狩獵과 驅獸(구수)의 일을 맡았으며 아들 扶餘는 禮俗(예속)을 管掌(관장)하였고, 元輔(領議政의 官稱)彰虞(창우)는 山川과 土地를 保護 管理하는 일을 맡았는데 後世人들은 彰虞를 仙王이라고 불렀다. (普通 峻嶺通路에 祠堂을 짓고 聚石을 한 다음 官民이 通過 할 때 반듯이 致誠을 드리는 風俗이 있는 바, 이를 仙王堂 이라 한다. 이는 彰虞 卽 仙王을 기리는 뜻이다.)

 

또 史官인 神誌(신지)는 書契(서글)을 撰述하는 일을 맡았으며, 農官인 高矢는 밭農事를 管掌하다(한족 풍속에 들이나 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밥 한술을 떠서 던지면서 高矢氏「고시레⋅고수레」 하였고 부르는데 이는 農官 高矢氏를 잊지 않는 때문인 것이다.)

 

또 藥官인 提持는 歌舞를 管掌하였고 君長(官名)이 余守己와 上長(官名)인 裶天生은 各各 民産品을 掌握하였으며 肅愼氏(숙신씨)는 弓矢를 만들고 沃沮氏는 斧矛(부모)를 만들고 檀君의 세 아들에게 命하여 穴口(江華府에 그 城이 있는데 俗稱 「三郞城」이라 한다)에 築城을 하게 하였다. 또 摩尼山(만리산⋅마니산)에 石壇을 쌓게 하여 하늘에 祭祀지내고 하늘과 祖上의 恩惠에 報答하는 本을 보여 주도록 하셨다.

 

在位 93年되는 庚子 3월에 檀君께서는 阿斯達(九月山)에 드시어 神으로 化하시어 御天하시니 때의 御世가 大略 216년이셨다.(九月山에는 御天石臺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 後 子孫들이 分居하여 繁盛하였는데 扶餘는 다시 갈라져서 東扶餘⋅北扶餘⋅卒本扶餘 ⋅徐苑扶餘⋅南扶餘가 되고 그 支派가 濊(예)⋅貊(맥)⋅沃沮(옥저)⋅肅愼(숙신)이 되었다. 徐苑扶餘는 그 後에 新羅(BC 57~AD 935), 高麗(918~1392), 朝鮮(1392~1897), 韓 (1897~1910)으로 이어진다.

 

卒本扶餘는 그 後 高句麗(BC 37~ AD 669), 渤海(699~926), 女眞(東西女眞이 있다)이다. 東女眞의 後孫은 金(125~1234), 滿淸(1616~1911)이며 南扶餘의 後裔는 百濟(BC 18~ AD 660)이고 箕氏朝鮮의 後孫은 馬韓이며 濊의 後孫은 徐濊⋅東濊⋅不耐濊이고, 徐濊의 後孫은 徐國이라 한다.

 

徐國은 濊의 初期에 殷나라 小乙(BC 1349~1339)王이 衰弱해진 때를 맞이하여 南쪽 徐州(安徽省 泗縣의 北쪽에 故域이 있다)地方에 雄據하였는데 疆城(강성)을 널리 開拓한 뒤에 國號를 마침 徐國이라 하였다. 마침 周나라 穆王(BC 1023~ 982) 때에는 徐國이 周나라 軍師를 黃河(舊黃河를 뜻 한다 지금의 安徽省 北端을 흐른다)의 沿岸에서 크게 破하니 周나라 穆王은 降伏하여 周나라와 徐나라 兩國間의 國境을 定하였는데 西쪽은 周나라가 東쪽은 徐國이 차지하였다.

 

徐國의 偃王(언왕)(BC 10世紀頃)은 仁德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來朝하여 朝貢하는 나라가 50餘國에 이르렀다.

 

周나라가 末葉에는 楚나라 靈王(BC 572~544)과 申 (春秋때의 나라 稱號 姜城이며 故城은 河南省 南陽縣의 北方)에서 會盟하였고 後에 瑯瑯(山東省 諸城縣의 東南)으로 都邑을 옮겼다가 楚나라에 의하여 滅亡하였다. 徐國의 亨國年間이 約 1000年間이나 繼續되었다.

 

舊來에 傳하는 바에 依하면, 徐國은 浙江省(절강성) 紹興郡(소흥군)을 中心으로 그 周圍에 三千里의 땅을 統治하고 있었다고 하며 또 崔致遠(858~?)이 唐나라 宰相에게 보낸 回答書에는 百濟國이 中國의 江蘇省과 浙江省 一帶를 占領 했다는 말이 있고 또 兩省의 土音은 우리나라 말과 같이 쓰는 사람이 많으며 구 遺音이 아직까지 存在하는 理由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예국의 후예는 北濊(북예)⋅胡貊(호맥)⋅梁貊(양맥)⋅句麗貊(구려맥)⋅小水貊(소수맥)⋅濊貊(예맥)⋅牛首貊(우수맥)이며 그 中에서 最强族은 北貊(북맥)⋅鮮卑(선비)⋅契丹(글란)⋅遼(요)이다. 沃沮(옥저)의 後裔(후예)는 東沃沮⋅北沃沮이며 肅愼(숙신)의 後裔는 勿吉(물길)⋅靺鞨(말갈)⋅女眞(여진)⋅黑哲(흑철)이라 한다.

 

 

[註 1] 金敎獻91868~1923)이 지은 『神壇實記』나 이외 별본을 지칭 한 듯하다.

 

[註 2] 『124年의 神市時代』 이는 大倧敎의 敎理에서 緣由된 것이다.

 

[原文]

 

 

三. 倍達民族之起源.

 

今先擧倍達族(卽韓族檀木謂之倍達也)之起源. 與檀君之開化. 及兩民族之歷來關聯. 上古瀛海(濟州)以北. 小海(黑龍江)以南. 九夷(夷大弓東人善弓)分居. (伏羲虞舜幷生於此. 載神檀記)四千三百九十年前. 有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 持天符三印. 化育人物. 宣道設敎. 建都開國曰朝鮮. (朝日鮮明之意)主五事.(穀, 命, 病, 刑, 善惡)治人間三百六十六事. 以定男女. 父子, 君臣, 飮食, 衣服, 居處, 編髮蓋首之制. (自神人降生至建國之前. 百二十四年. 謂之神市時代). 匪西岬神后肇勤紡織. 太子扶婁陶冶備器. 子扶蘇嘗藥治病. 子扶虞掌獵驅獸. 子扶餘掌禮厚俗. 元輔彭虞奠山川土地. 後世稱彭虞仙王. (凡峻嶺通路. 皆建堂聚石. 官民過必致敬. 俗稱仙王堂)史官神誌撰書契. 農官高矢治田. (韓俗鎑畝. 必先呼高矢氏. 不忘其本)樂官提持協和歌舞. 君子余守己. 上長裶天生各製民産. 肅愼氏作弓矢. 沃沮氏造斧矛. 命三子築城於穴口. (江華府, 俗稱三郞城)又築石壇於摩尼山. (江華府)以垂祭天報本之義. 在位九十三年之歲庚子三月. 入阿斯達山. (九月山)化神御天. 在世二百十六年. (九月山御天石臺. 今尙巍然)其後子孫分居繁殖. 曰扶餘. 再分曰東扶餘, 北扶餘, 卒本扶餘, 徐菀扶餘, 南扶餘. 其支派曰濊, 貊, 沃沮, 肅愼. 徐菀扶餘之後曰新羅. 曰高麗, 曰朝鮮, 韓.

 

卒本扶餘之後曰高句麗, 曰渤海, 曰女眞. (東海)東女眞之後曰金, 曰滿淸, 南扶餘之後曰百濟. 箕氏朝鮮之後曰馬韓. 濊之後曰徐濊. 東濊, 不耐濊. 徐濊之後曰徐國. 徐偃干在殷小乙之衰也. 南據徐州. 廣拓彊宇. 國號曰徐. 及周穆王侵伐徐屬. 徐大破周師於河上. 穆王請和分界. 西屬於周. 東屬於徐. 偃王有仁德之化. 來朝之國有五十餘. 周末與楚靈王會盟于申. 後移都瑯瑯. 爲楚所敗. 徐之立國千餘年. 舊傳徐國有環紹興三千里地. 又崔致遠答唐朝宰相書. 有百濟占領江浙之事. 今江浙土音. 與韓語同者多. 其遺音未知尙存也. 貊國之後曰北貊, 胡貊, 梁貊 句麗貊 小水貊., 濊貊, 牛首貊⋅其中北貊最强. 曰鮮卑. 曰契丹. 曰遼. 沃沮之後曰東沃沮, 北沃沮, 肅愼之後曰勿吉, 靺鞨, 曰女眞, 黑哲.

 

 

 

 

출처 : 구국의 지도자
글쓴이 : 마당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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