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의 神功皇后에 關한 이야기
出典 : 感時漫語 (성재 이시영/부통령 저)
蝦夷(하이)라는 族屬은 본디 人類의 正義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르지 떠돌아다니며 掠奪(약탈)을 하는 것을 生業으로 삼고 사는 族屬인데 그 來歷은 오래 前부터이다. 그런데 저들은 不幸하게도 韓族과 隣接해 살게 되었다. 이네들의 侵寇(침구)⋅窃奸(절간)은 멀리 三國時代로부터 高麗⋅朝鮮에 이르는 2,000年間에 걸쳐 大寇에서 小寇에 이르기까지 모두 史書에 記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壬辰倭亂의 큰 戰爭을 除外하면 저들의 侵掠(침략) 도둑질은 좀도둑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끔 바닷가에 侵入하여 勝負를 내는 騷擾事件(소요사건)이 있는 程道였다. 그러나 신라시대에 땅을 빼앗기고 降伏(항복)을 했다든가하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도 없으며 野史나 口傳을 두루 살펴보아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다. 萬若 이와 彷佛(방불)하고 近似(근사)한 記錄이 있다면 저들이 반듯이 成文으로 擧證하였더라도 이는 부질없이 誇張(과장)해 적은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韓族(한족)이 日本을 討伐(토벌)하였다는 말은 뚜렷하게 記錄으로 남아있다. 廣開土王이 日本을 南征하였다든가 新羅가 數次 日本을 征伐하였다든가와 같은 것이다.
金世濂(김세렴 1593~1646 朝鮮朝仁祖 때 名臣)의 『海槎錄(해차록)』에는 다음과 같은 記錄이 있다.
『日本年代記』라는 冊에 日本의 應神王(응신왕) 22年 新羅가 日本의 明石浦를 征伐했는데 이 明石浦는 大阪으로부터 100里 되는 곳에 있다.
赤關(적관)의 東쪽에 한 언덕이 있는바 日本사람이 이를 가르켜 馬塚(마총)이라 했다. 卽 新羅의 軍士들이 깊숙이 日本을 쳐 들어오니 日本이 降伏하고 武裝解除(무장해제)를 했는바 이 때 白馬를 降伏의 表示로 죽여 이 언덕에 묻었다. 고 하였다.
新羅의 太宗(603~661 29代 武烈王)이 日本을 征伐하여 大勝했으며, 眞平王 4년(382年) 卽 日本의 敏達王(민달왕) 12年에 日本의 西쪽 地方을 征伐했다는 記錄이 있다. 또 安順菴(安鼎福 1712~1791)의 記錄에 依하면 絶影島(절영도)라는 섬에 오래된 要塞地(요새지)가 있는데 新羅의 太宗武烈王이 倭國을 征伐할 때 築造(축조)한 것이며, 俗稱(속칭) 「太宗壇」이라 불린다고 했다.
또 고려 원종15년(1173년)에는 金方慶(김방경)⋅朴之亮(박지량)⋅金忻(김흔) 等에게 命하여 元나라 兵士와 함께 聯合하여 日本을 攻擊(공격)하였는데 對馬島의 壹岐(일기)를 侵攻하여 三郞浦에 進擊 3,000餘名을 베고 尸如麻(시여마)에 埋伏(매복)했다가 때마침 大風을 만나 回軍하였다.
또 高麗 忠烈王(1274~1308) 7年 元帥 金方慶에게 命하여 戰船 900雙으로써 水陸兩軍 40,000名을 이끌고 元나라 元帥 忻都(흔도)와 洪茶印(홍다인) 等과 함께 日本을 征伐하여 大明浦와 壹岐島(일기도)를 大破하여 敵을 斬(참)하고 노획함이 많았는데 그때 元나라는 다시 范文虎(범문호)로 하여금 江南의 兵力 100,000을 이끌고 戰船 3,000으로써 江蘇省(강소성)으로부터 日本의 國境을 侵攻하였는데 때마침 颱風(태풍)을 만나 全軍이 물에 빠져 沒殺 當하여 回軍하고 말았다. 이 戰役에서도 高麗軍은 늘 이겼으며 決코 敗하지 않았다.
高麗 末期에 이르러 日本의 侵寇가 더욱 甚하였는데 朝鮮王朝의 太祖 李旦(이단)은 여러 차례 大勝을 거두었는바 저 智異山(지리산) 山麓(산록)에서 數千의 倭寇(왜구)를 斬(참)하고 다음에는 倭寇의 勢力도 潛潛(잠잠)하여 숨을 죽이게끔 되었다.
李成桂(李旦)가 凱旋(개선)하여 돌아오는 날 崔瑩(최영) 大將軍(대장군)은 『三尺의 칼끝으로 社稷(사직)을 平安케 하였도다.』라는 詩句로써 李將軍의 戰功을 讚美(찬미)하였다.
朝鮮朝 定宗(1398~1400)이 對馬島를 征伐하였고 世宗大王(1455~1468)은 李從茂⋅柳廷顯을 命하여 兵船 277雙과 水陸軍 17,000名을 動員하여 對馬島를 征伐하여 2,939戶의 집을 불태우고 300級의 머리를 斬하고 日船 149雙을 노획하니 對馬島主 宗貞盛이 降伏하여 마침내 兵士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三浦를 열어 倭國과의 貿易을 許容하게 하였다.
예로부터 日本의 侵寇가 줄을 이어 海上侵寇는 때를 가리지 않고 끊이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이를 擊退(격퇴)하였음으로 別로 大端치 않는 걸로 여겨왔다.
더욱이 倭寇의 侵犯을 歷史的으로 觀察하건대 韓國海岸에 對한 侵寇에 그치지 아니하고 中國의 江蘇省(강소성) 浙江省(절강성) 等地와 皖閩(환민)(安徽省의 古號)의 沿邊은 被害가 甚했다.
저 朱元璋(주원장)이 明나라(1386~1644) 300年間 倭寇를 防禦(방어)하는 일에 從事(종사)하느라 海洋(해양)과 內陸地方(내륙지방)은 永遠(영원)히 便安(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要塞地(요새지)마다 피 흘린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을 정도였으니 바닷가의 一部 區域은 倭寇가 모여들고 흩어지는 場所로 되었으나 明史를 훑어보면 海寇 때문에 땅을 빼앗겼다고는 記述하지 않았다. 그 것이 바로 事實을 쓰는 書法인 것이다.
우리나라와 倭寇의 關係는 亦是 同一한 例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黃炎培(황염배)는 오직 日本側의 記事만을 홀딱 믿고 글을 쓴 폼이 日本으로 하여금 거짓 證據를 들도록 許容하게 하였으니 그의 意圖가 可히 아리송한 바 있다.
神功皇后의 거짓 歷史大目은 日本人의 虛僞와 侮蔑(모멸)이 特(특)히 甚(심)한 歷史토막이다. 처음에는 和를 乞해서 割地 했다고 거짓말을 해두고 또다시 歷史地圖에 色칠을 바꾸어 해놓고서 거짓말을 하는 따위의 誣妄(무망)의 虛說을 事實인양 꾸며놓았다. 黃君이 이 大目에 가서 한때나마 疑心(의심)을 두지 않고 盲信(맹신)하고서 그러한 事實이 典據(전거)가 있는 듯이 적어 놓았으니 이는 理解(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다.
或者(혹자)는 말하기를 지금 半島(반도)의 山河는 이미 地圖의 색깔이 바뀐지 몇해가 지냈는데 구구하게 過去의 흘러간 史跡이 있고 없고를 따져서 밝혀본들 무슨 所用이 있겠는가라고 하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나라도 滅할 수 있고 사람도 죽일 수 있으나 歷史는 眞實을 드러내야 하며, 거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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