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스크랩] 처용가무(處容歌舞)

마당쇠행정사 2014. 4. 20. 06:13

처용가무(處容歌舞)

 

봄날 학성에서 놀던 신라의 왕 / 鶴城春日讌羅王

신룡을 한 개의 향으로 감동시켰네 / 感動神龍一炷香

처용가를 부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 處容歌是霜髯舞

오색 옷 입고 오방으로 벌여 서네 / 五色殊容處五方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 지금의 울산(蔚山))에 나가 놀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길을 잃었다. 일관(日官)이것은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린 것이니 좋은 일을 행해서 풀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니, 영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혔으므로 이내 그 포구를 개운포(開雲浦)’라고 이름하였다.

그러자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어가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일명 상염(霜髯)’이다.

 

 

[C-001]처용가무(處容歌舞) : 처용가와 처용무를 말한다. 처용가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처용이 지은 향가로 삼국유사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전한다.

작품의 내용은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래 나의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요.”이다.

삼국유사에는, “처용은 서울에 들어와서 정사를 도왔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역신(疫神)이 처용 처의 미모를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밤에 처용의 집에 가서 처용의 처와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두 사람이 있으므로 이에 처용가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자,

역신이 그의 노여워하지 않음에 감복하여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이후로는 처용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 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았다.”라고 하였다.

 

 

 

황창랑무(黃昌郞舞)

 

관창이 황창랑으로 와전된 것인데 / 官昌訛誤黃昌郞

역사엔 칼로 치던 장소 징빙할 수 없네 / 史傳無徵擊劍場

여덟 살의 어린아이로 보복을 계획하여 / 八歲眇童謀釋憾

술동이 앞에서 백제 왕 깜짝 놀라게 했네 / 樽前驚起夫餘王

 

 

창랑(昌郞)은 여덟 살 때 신라 왕을 위하여 백제에 보복할 계획을 하고 백제의 저자에 가서 칼춤을 추었다. 이에 백제 왕이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칼춤을 추게 하였더니,

창랑은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그래서 후세에 가면(假面)을 만들게 되었다. 창랑은 바로 관창(官昌)의 와전이다.

 

 

[D-001]관창(官昌) : 신라 무열왕(武烈王) 때의 화랑으로 좌장군(左將軍) 품일(品日)의 아들인데 일명 관장(官狀)이라고도 한다.

그는 어린 나이로 황산(黃山) 싸움에 처음 출전하였다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으나, 계백(階伯) 장군은 그가 어리고 또 용맹한 데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적장을 죽이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또 적군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계백이 이번에는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그의 용감한 죽음에 자극된 신라군은 분연히 진격하여 계백을 죽이고 백제군을 대파함으로써 백제를 평정할 수 있었다.

그의 용맹과 충절은 후인들에게 칭송되었고, 고려 말기에는 경주 지방에서 관창의 가면검무(假面劍舞)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出典 : 林下筆記

출처 : 우국충정(憂國衷情)
글쓴이 : 마당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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