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園 李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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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說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외배·올보리 등. 익명은 노아자·닷뫼·당백·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 아버지는 종원(鍾元)이며, 어머니는 충주김씨(忠州金氏)이다.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生涯 및 活動事項
8세 때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고,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 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일을 맡아보았다.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메이지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 선교사들의 성경 시간에서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 奴隷>, 18일에 일문 <사랑인가>, 24일에 <호 虎>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 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 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 때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스토(Stowe,H.E.B.)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 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전영택(田榮澤)·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 <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 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 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부조 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 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 생활에 힘썼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 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 위반 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 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다.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 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었는데, 이 글은 이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민족개조론>과 함께 나라 잃은 원인을 국민성 자체의 약점으로 돌리는 한편,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단종애사>(1928)·<혁명가의 아내>(1930)·<이순신>(1931)·<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 1940년 창씨개명 이후 이광수는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을 썼다.
또한 <반도민중의 애국운동> 등의 평론, <자원병훈련소> 등의 방문기 등 모든 문학 장르에서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43년부터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광수의 문학관은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는 작자의 말을 참고하더라도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무정>을 ‘노일전쟁에 눈뜬 조선’, <개척자>를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재생>을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을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실주의문학을 지향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전쟁을 겪었고, 부모를 잃은 뒤 동학당 일을 본 탓으로 일본 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을 때가 노일전쟁 중이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 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 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일전쟁 발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다. 6·25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논설문·시가·수필류·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언론인·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 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연구자들은 그가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그의 친일 행위는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
『이광수소설연구』(구인환, 삼영사, 1983)
『최남선과 이광수의 문학』(신동욱 편, 새문사, 1981)
『한국근대소설연구-이광수-』(윤홍로, 일조각, 1980)
『이광수』(김현 편, 문학과 지성사, 1977)
『현대한국연구-이광수론-』(이선영, 민음사, 1976)
『한국근대문학연구』(김윤식, 일지사, 1973)
『이광수전집』 1-20(이광수, 삼중당, 1964)
『한국인과 문학사상』(김붕구 외, 일조각, 1964)
『춘원이광수』(박계주·곽학송, 삼중당, 1962)
『춘원연구』(김동인, 신구문화사, 1956)
[네이버 지식백과] 이광수 [李光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춘원 이광수의 딸' 이정화 박사 최초 인터뷰]
"남편(춘원)을 살릴까 아들을 살려야 할까 오락가락하던 어머니… 결국
아들을 택했어요" "어머니의 현실적인 눈에는 '위선자'로 비쳤을 아버님…
그런 고귀한 사상은 인간으로는 가질 수 없기에…"
―6·25 때 가족이 이민을 떠난 겁니까?
"부산에 피란을 내려와 이화여고를 다닌 뒤 언니와 함께 화물선을 타고 미국
―춘원을 '친일파' '매국노'로 몰고 간 한국 사회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아니오. 우리는 애국심이 있어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오빠는 한국에 거의 발길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여섯 살 위 오빠와 두 살 위 언니가 있어요. 두 분은 미국서 한국 쪽을 바라
- 이정화 박사는 "지금 서울 효자동의 '연정'이라는 한정식 집이 6·25 때 우리 집이었다"고 말했다. /주완중 조선일보 기자
―춘원이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돼 수감됐을 때 '병든 아버님을
풀어주고 나를 대신 잡아넣어라'는 혈서를 썼던 오빠지요?
"혈서를 쓸 때도 바늘로 톡 찌르면 될 텐데 그냥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네요. 가슴 아픈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오빠는 좀 쉬도록 해야죠."
춘원은 6·25 때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됐다. 북으로 끌려간 그는
1950년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58세였다.
―6·25 당시 춘원이 납북될 때 가족이 곁에 있었나요?
"당시 아주 얌전한 어린 인민군이 내무서 직원과 함께 잡으러 왔대요. 어머니가
인민군 앞에 큰절을 하며 '잡아가지 마라'며 빌었어요. 그러자 인민군이 '절하지
마세요. 봉건주의 사회에서 배운 나쁜 풍습이에요'라고 했대요.
이 장면을 보고 아버님이 빙그레 웃으며 '부인이 남편을 위해 그러는 것이니
나쁜 풍습이 아니다'고 했답니다."
―그게 생이별이 됐군요?
"아버님은 한 번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잡혀갔어요. 그때 우리 가족도
집에서 쫓겨났어요. 지금 서울 효자동의 '연정'이라는 한정식 집이 우리
집이었어요."
―당시 춘원은 왜 몸을 피하지 않았죠?
"피신할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남편을 살려야 할까, 아들을 살려야 할까'를
놓고 오락가락했어요. 아버님에게 '도망가라'고 했다가 나중엔 '가지 마라'고
했대요."
―무슨 뜻이지요?
"그때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갈 나이였어요. 집 지하실에 숨어 있었어요. 아버
님이 도망가면 집을 뒤져 오빠를 찾아냈을지 몰라요. 엄마의 본능은 역시
아들이었어요."
- 춘원 이광수
―어머니(허영숙)는 그런 선택에 대해 어떤 말씀을 했나요?
"후회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요. 나중에 아버님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미국
서 장례식을 행했어요. 어머니는 '당신의 생각이 너무 높아서 돌아가신 뒤에야
위대함을 알았다.
함께 살 때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 하늘에서 만나면 착한 부인이 되겠다'고
했어요. 생전에 아버님을 많이 구박했지요(웃음). 어머니의 현실적인 눈에는
아버님이 '위선자'로 비쳤을 테니까요."
―남편인 춘원이 '위선자(僞善者)'로 비쳤다니….
"아버님이 말하는 그런 고상한 사상은 인간으로는 가질 수가 없다는 거죠. 어머
니는 강한 성격이었고,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렸지요. 자신이 운영하는
산후원(산부인과 병원)에서 일을 잘 못하고 말 안 듣는 의사나 간호사의 뺨을
때리기도 했어요. 소설(小說)의 주인공이 돼도 좋을 캐릭터이지요. 흥미로운
일생을 사셨어요."
―집안에서 부부의 역학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아버님이 꼼짝 못했어요(웃음). 아버님이 쓴 '아내의 설교'라는 시가 있어요.
화자(話者)를 어머니로 한 것이지요. '당신은 악인(惡人) 나도 악인/ 그렇지만
나는 스스로 악인이라고 인정하는데,
당신은 선인(善人)인 척해 남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나는 손이 다 닳도록 당신을
위해 살았는데 당신은 날 위해 무얼 했소/ 그러니 나를 이해라도 해주는 남편
이라도 돼 주소서'라고요."
―말하자면 아내의 '잔소리'이군요.
"사실 아버님은 어머니에게 의지해 살았지요. 아버님이 신장과 허파를 하나씩
잘라내고 생사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곁에서 어머니가 돌봐주셨어요. 아버님의
작품 중 '사랑'은 침상에 누워 구술해서 썼다고 합니다."
춘원과 허영숙은 도쿄(東京) 유학 시절 만났다. 춘원에게는 이미 중매 결혼한
부인이 있었다. 춘원은 1919년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뒤 상하이로
건너갔다.
거기서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자 허영숙이
중국까지 춘원을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 집이 부자였어요. 집 안 금고를 뜯어 돈을 챙기고는 '제 몫의 상속을
포기합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나왔다고 해요. 여자 혼자서 열차를 타고
찾아간 겁니다. 어머니는 갖고 온 돈으로 상하이에서 산후원을 열고는
아버님과 살림을 할 생각이었지요."
―상해 임정에서는 "허영숙이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고 이광수를 귀국
시켰고 타락시켰다"는 말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상하이의 호화로운 호텔에서 아버지와 하룻밤 지냈대요. 이 소문이
나자 임시정부에서 '일제 앞잡이 허영숙을 잡아라'는 체포령이 떨어졌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아버님에게 '허영숙을 보내고 자네는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유서를 남기고 양자강에 몸을 던지려고 했대요.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물이 더러워서 못 했다'는 거예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랬겠지요(웃음)."
허영숙이 춘원을 귀국시켰다는 비난은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그때 이미 춘원
자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상해 임정에서 2년을 지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국내
상황 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춘원은 상해 임정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춘원은 '친일파'의 길로 가지 않았겠지요.
"성삼문과 안중근 의사는 독야청청하신 분이고, 아버님은 정이 많은 예술가였으니…."
적극 항일(抗日)에서 현실 타협으로의 노선(路線) 변화를 보여준 춘원의 첫
번째 작품이 '민족개조론'(1922년)이었다. 열등한 민족성으로는 당장 독립
하는 것이 시기상조이니 민족성부터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글이 발표된 뒤 청년들이 집으로 몰려와 '춘원 나와라'고 외쳤대요. 한
청년은 칼을 들고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벌벌 떠는데, 아버님은 뚜벅뚜벅
걸어나가 청년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였어요. 대화를 나눈 뒤 청년들이
얼마간 설득돼 그냥 돌아갔대요."
춘원이 '적극적 친일'로 간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면
서다. 수양동우회는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전위조직으로 교육·
계몽·사회운동 단체였다.
일제가 이 단체의 회원들에 대한 대규모 단속을 벌였고, 춘원은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했다. 그 뒤로 춘원은 '나는 천황의 신민.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며 창씨 개명을 했다. 그는 학병(學兵)을 권하는 글도
썼다.
―춘원이 '적극적 '친일'로 갔을 때 어머니는 뭐라고 했나요?
"수양동우회 사건에 41명이 연루됐어요. 자신은 친일 누명을 쓰더라도
이들의 유죄를 막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당신 미쳤
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며 울었답니다.
아버님도 울면서 '나는 이 길을 가야겠다'고 했대요. 아버님은 일제에
계속 저항하면 한글이 폐지되고 민족도 말살된다고 봤어요. 과대망상
이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춘원이 정말 그런 고귀한 뜻을 갖고 친일을 했다고 믿습니까?
"아버님은 아기 같은 면, 영적(靈的)인 면이 있었어요. '무차별 사랑' 같은
불교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어요. 광복이 된 뒤에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
었다'고 고백했어요.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 매도될 줄은 몰랐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자살을
못 한 나로서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했으니까요."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광복된 뒤 아버님이 '마음이 괴로울 때 읽어라'며 성경을 주셨어요. 표지
안쪽에다 붓글씨로 '자안시중생(慈眼視衆生·모든 중생을 자비롭게 보라)'을
써줬어요.
또 염주를 주시며 '내가 보고 싶을 때면 관세음보살을 불러라'고 했어요.
마치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던 것 같아요. 6·25 때 우리가 집에서 쫓겨
나올 때 인민군이 짐 보따리를 조사해 그 속에 어머니가 감춰둔 돈은 모두
압수했어요.
성경과 염주를 보고는 '이런 건 다 쓸데없는 것이에요'라고 말하면서도 되
돌려줬어요. 지금도 제가 갖고 있는 아버님의 유품입니다."
―한국에 들어오면 '춘원의 딸'이라고 밝히는 게 쉽지 않지요?
"제 전공이 분자생화학인데, 1980년대부터 한국의 대학에서 네 번이나 초빙
돼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어요. 한 번은 기자가 알고 찾아와서는 '사과
할 뜻이 있느냐?'고 물었어요.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온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는 안 받아도
좋은데, 좀 그렇구나 싶었어요. 연좌제(緣坐制) 비슷한 게 있으니 제 팔자는
민족 앞에서 사과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섭섭함이 있군요.
"세월이 가면서 정리가 됐어요. 아버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감사를, 미워
하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제 입장을 이렇게 밝히는 것은
처음입니다."
그는 미국서 살면서 1998년까지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인도인 독립
운동가(작고)와 결혼해 1남2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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