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으로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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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쇠행정사 2009. 9. 5. 08:34

"당시, 국민 60%가 쿠데타 지지했다. "

시민들의 쿠데타 지지가 60%였다.

필자가 쓴 박정희 전기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관련 부분을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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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방첩대의 여론조사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하느냐,
아니면 매그루더의 미8군과 이한림 의 1군에 의해서 진압되느냐.

한국의 운명이 이처럼 기로에 서 있던 5 월17일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에게 전문을 보낸다.

<군사쿠데타 배후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 는 듯하다.
미 8군의 방첩대(CIC)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을 상대로 조사해 본바
열 명에 네 명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고,
두 명꼴로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으며,
네 명꼴로 반대하고 있었다.

장도영 총장은 이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의기소침한 상태 라 행동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윤보선 대통령과 백두진참의원 의장은 진압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주요인사들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쿠데타의 기본 목적은 장면정부의 제거 또는 내각제를 없애버리자는 것으로 보인다.
반미 또는 친공 성향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번 쿠데타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인데
그는 이승만 정부하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 후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데 협력했다.
그 이후로는 반공주의자란 평판을 얻었다.
쿠데타 세력 안에서 반미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장교들은 없는 것같다.

이한림 사령관의 충고에 따라서, 또 1군을 내 지휘권 안에 묶어둠으로써
모든 중립적인 부대들이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합헌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지지한다고 방송해 왔다.
나는 반란군의 지휘부에 대해서 본대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이는 반란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해병대는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나 6 군단포평단은 원위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
장도영은 계엄사령 관의 직책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서울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은 4개 사단을 출동준비 태세로 대기시켜놓고 있다.
이 부대들을 서울로 끌고들어오면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한림은 장면 총리가 명령하면 반란군을 진압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아마도 내 명령에도 복종할 것이다.

나는 장면 총리가 간밤에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오늘 아침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측근들과도 접촉해보았는데 그들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제발 우리한테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무 응답도 없다.
만약 장면 총리가 1군을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한다면
나는 그의 지시를 지지할 것이다.
그가 그런 지시를 내릴 때까지는 1군을 그런 목적을 위하여 내편으로 묶어둘 작정이다.
나는 언제까지 1군을 우리편으로 묶어둘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장면이 숨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그가 정권을 회복할 확률은 낮아진다.

하나의 가능한 방법은
대통령, 참의원 의장, 국방장관, 육군 참모 총장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내가 이한림에게 명령하여 1군으로써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한다 해도, 그리하여 정권이 회복된다 하더라도
그 정부를 이끌 지도자가 없는 상태,
그리고 이미 국민들의 지지가 없어진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내 임무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다.
아울러 한국 내부의 공산세력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도 나의 한 임무이다.

그런데 쿠데타세력은 전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으나
공산당이 조종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나는 내 권한만을 이용하여 1군을 동원, 쿠데타군 을 진압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제기하는 바이다.>.
매그루더의 이 전문은 많은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서울 시민 다수, 즉 약 60%가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1군을 붙들어두는 것은 있을지도 모를
장면의 출현과 진압명령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
장면의 진압지시만 떨어지면 매그루더도 1군에 작전을 명령할 태세가 되어있다는 사실,
그리고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그 자신의 권한만으로 진압을 시작하기엔
너무 무리가 따른다는 판단 등이다.

장면 총리의 은신이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이 전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한편 혁명군의 두뇌 역할을 맡은 김종필은
미리 준비했던 포고령을 차례로 발표하여 군사정권의 힘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있었다.

포고령 제5호는 '금융기관의 인출은 1회에 10만환 이하, 월간 50만환까지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6호는 '물가를 16일 현재선으로 동결하고 매점매 석 행위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했다.

7호는 '외국인의 재산 및 생명을 보호한다'는 것이었고,

8호는 '금융동결령 가운데 군사비는 제외한다' 는 것,

9호는 '통행금지 시간을 완화하여 17일부터는 밤10시부터 다음 날 5시까지로 한다'는 것,

10호는 '혁명완수상 필요하면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고
군사재판소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11호 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지시였다.

<법원과 검찰에 재직하는 공무원은 구태를 일소하고
혁명정신에 입각하여 새롭고 정기찬 사법운영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모든 민형사 사건은 지체없이 정상적인 법체제 아래에서 신속공정히 처리하라.
대법 원장과 법무부 장관은 위의 사항에 관한 실정 기강을 본관에게 제시하라.>.

혁명군 본부가 된 육본 상황실에서 사법 기능을 통제하고있던 이는
장교 시절 고시준비를 하여 법률에 밝은 이석제 중령이었다.

그는 미국 정보기관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석제는 '골치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이런 상황에서 폭로되고 이용당하면
쿠데타는 실패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석제는 이 미묘한 문제로 누구하고 상의도 할 수 없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석제는 자신의 결심으로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심 많은 미국측에 보여줄 결백증명을 생각하다가
'전국에 있는 좌익 사상범들을 체포하자'는 발상에 도달했다.
그는 전국의 군수사기관 헌병, 그리고 경찰, 검찰에 비상을 걸었다.

'좌익사상범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전국에 검거선풍이 불었다.
장면 정부 시절에 표면에 등장했던 좌익세력뿐 아니라 혁신정 당 관련자들,
교원노조 관련자들, 보도연맹원들(전향한 공산주의자 모 임), 노조 지도자들 등
약 4천 명이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진짜 좌익과 억울한 사람들이 뒤섞였다.
역사가 크게 굽이치는 상황에서는 개인은 힘없이 격류에 휘말려드는 법이다

[516혁명 동영상]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52679&logId=2251112&menuId=231862&from=19000101&to=29991231&listType=2&startPage=1&startLogId=999999999&curPag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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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필자가 쓴 1998년 월간조선 8월호 [편집장의 편지] 중 관련부분이다.


<저는 지난 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는 가운데
진 K.로버츠슨이란 분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은 서진규인데 미 육군에서 소령으로 전역하여
하버드에서 박사과정 연구를 하고 있는 50세의 교포 여성이었습니다
.

이분은 1991년에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우리나라에 와서 아주 재미있는 여론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40세 이상의 어른들 4백67명을 상대로
「1961년에 5.16이 났을 때 지지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46%가 「지지했다」고 응답했고 19%는 「반대했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찬반 의견을 표시한 사람들 중 약 70%가 「혁명을 지지했다」는 뜻입니다.
로버츠슨씨는 연령층을 확대하여 8백 8명을 상대로
「5.16 혁명의 한국 발전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물었다고 합니다.

응답자의 62%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5.16혁명은 필요했다」고 답했고
17%는 「방해가 되었다」고 했으며 21%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69%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11%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으며
20%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로버츠슨씨가 이런 조사를 한 이유는
당시 중학생으로 맞았던 5.16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군사혁명을 환영하고 있었던 것을 뚜렷히 기억하는데
학자들의 논문에는 이런 여론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게 이상하여 그런 조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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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규] 난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가난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집안에서 ‘가시나’로 천대받았던 그였다. 고교 졸업 후 가발공장 등을 전전하다 23세 때 100달러짜
리 지폐 한 장 들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식모 이민’을 떠났던 그였다. 그가 드디어 하버드대 박사가 된다. 6월 8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손에 쥐게 되는 서진규(58) 씨. 1999년 자전 에세이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로 한국 사회에 ‘희망’이라는 화두를 던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는 그를 최근 보스턴 하버드대 교정에서 만났다.》
 

 “정말 꿈만 같아요. 제가 속한 하버드대 문리대에서는 석사 과정 입학 10년 안에 박사학위를 따도록 돼 있어요. 제가 1990년에 석사 과정에 입학했으니깐 2000년부터는 매년 대학본부에서 ‘올해까지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협박성 편지’를 보내 왔어요. 그때마다 학과에서 제 사정을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서 씨는 “계산을 해보니 제가 학생증을 갖고 있던 기간이 통틀어 31년이다”며 “어렸을 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한이 맺혔는데 그 때문인지 공부를 실컷 하는 게 제 운명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그의 이력은 평범하지 않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가정부로 일하기 위한 미국행, 뉴욕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두 차례의 결혼과 이혼, 미군 입대, 14년간 5개 대학을 옮겨 다닌 끝에 학사학위 취득, 마흔둘의 나이에 소령 예편 후 하버드대 석사 과정 입학….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하버드대 국제외교사 및 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받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한국에서 미군정에 미친 일본의 영향’.

 “교수님들은 나이가 든 학생이라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요. 몇 차례나 논문이 퇴짜 맞을 때는 내가 과연 박사학위를 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까지 들었어요.”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C형 간염이 악화돼 어려움을 겪은 사실도 털어놓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갔는데 수치가 위험한 수준으로 나왔어요. 공부하느라 무리하면서 더 악화됐나 봐요. 이러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는 1년 정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치료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와 병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치료 시기를 미뤘어요. 이제 박사학위를 땄으니깐 한국에 가서 1년 정도 쉬면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에요.”

 

50대의 나이에 딸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한 하버드대 생활은 어땠을까(서 씨의 딸인 성아 씨도 하버드대 출신이다. 성아 씨는 학생군사교육단에 지원해 현재 미 육군 대위로 하와이에서 근무 중이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무서울 만큼 똑똑해요. 저처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상대가 안돼요.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도 많이 느꼈어요. 그러나 저는 경험이 많잖아요. 그래서 강의실에서 토론할 때 주로 경험을 무기로 활용했는데, 항상 아슬아슬했지요. 그래도 함께 맥주도 마시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그는 하버드대에서는 ‘독종’으로 통한다. 논문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이 500권을 넘는다. 뒤늦게 시작한 일본어 실력도 이제 일본인을 대상으로 큰 불편 없이 강연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그에게 그동안의 수많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젊은 시절에는 분노와 오기였어요. ‘왜 나는 무시 받아야 하나’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돼’라는 오기 때문에 살아왔지요. 그러나 제가 어느 정도 성취한 뒤에는 그 같은 오기와 분노는 사라졌어요. 이제는 ‘꿈’ 때문에 살아가요. 제가 이 나이에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요즘에는 제 책을 읽고 희망을 갖게 돼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됐다는 독자들의 편지도 큰 힘이 됐어요.”

 

그는 앞으로 책을 추가로 쓴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힘든 시절을 살아온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문 소설도 어느 정도 초고를 잡아 놓은 상태다. 또 20년에 가까운 군대 생활과 16년 동안의 하버드대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책으로 준비 중이다.


동아일보   2006-05-24 03:17:35
   보스턴=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출처 :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글쓴이 : 정치사기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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