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명예 지킴은 조선 여인의 덕목

마당쇠행정사 2009. 11. 16. 17:14

명예 지킴은 조선 여인의 덕목
조선시대의 과학수사(3)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충청도 서산면 부단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임충호라는 사람이 통문을 돌렸는데, 한 동네에 사는 유치극이 선왕의 법을 무시하고 그의 종고모인 유씨 부인과 놀아나고 있다는 내용이다. 통문은 ‘마을 회의를 여니 유치극과 아울러 통정하는 과부 유씨의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내 정풍(正風)으로 교화함이 당연하다. 만일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로 여기고 함께 처벌하겠다’라며 마을사람들이 반드시 회의에 참석하라는 경고도 들어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통문이 돌자 유씨 부인이 그럴 리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소문에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 순식간에 유씨 부인은 음행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소문을 듣고 치욕에 떨던 그녀는 곧바로 한 손에 낫을 들고 임충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임충호는 상황을 감지하고 이미 서울로 도주한 상태였다.
문제는 유씨 부인이 임충호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주위의 눈총을 이기지 못하고 다량의 간수를 마시고 자결했다는 점이다. 유덕수 등은 출빈(出殯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 놓은 뒤 이엉 등으로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장례 풍습)한 후 억울함을 풀어 달라며 임충호를 고발하였다.
그러면서 유덕수는 조선시대 반가의 부녀자들에게 주어졌던 면검(免檢) 권리를 요청했다. 검시를 할 경우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온몸이 발가벗겨져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꼴이나 다름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천민인 경우는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자진(自盡)한 유씨 부인의 방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지 못하고 애매한 소문 때문에 죽음을 택한 자신의 원한을 갚아 달라는 비장한 내용과 함께 시집 간 딸과 사위를 보지 못하고 죽지 않을 수 없는 애절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서산군수 김홍규는 다음 이유로 서울로 도주한 임충호를 당장 체포해 대령하도록 명했다.

“임충호란 자는 사족(士族)으로 독서하는 선비인데 이와 같은 통문을 돌리고 무근한 소문을 퍼뜨려 화근을 만들었으니 이른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어찌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임충호란 자가 아무 문제도 없는 부인을 원귀로 만들었으니 유아지율(由我之律 :직접 살인하지 않았지만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죄를 물어 처벌한 조선의 행형 제도)에 해당하는 것이요, 피고를 면키 어려운 것이다. 뚫린 구멍을 엿보고는 종적을 감추었으니 그 한 짓을 보면 더욱 극악하다. 따로 군의 순교를 보내어 잡아들이도록 하라.”

실제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생각보다 소문의 힘이 막강했음을 알게 된다. 단지 소문만으로도 마을에서 쫓겨나고, 관에 끌려가 도둑으로 취급당한 후 매를 맞았다. 심지어 유씨 부인처럼 자진하기에 이르렀으니 법보다 소문이 더욱 강한 구속력을 가졌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강진의 김은애가 안소사(安召史)를 죽인 사건을 보면 조선시대에 얼마나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 혐오스러운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김은애는 강진현 탑동리의 양갓집 딸이다. 창기였던 안소사는 김은애의 어머니로부터 쌀·콩·소금 등을 자주 빌렸는데 가끔 꾸어 주지 않자 앙갚음을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안소사는 남편 누이의 손자인 15세 남짓된 어린 최정련에게 김은애와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그가 좋다고 하자 김은애와 이미 사사로이 간통했다고 먼저 떠들고 다니며 결혼이 성사되도록 해 주겠다며 일을 꾸민 것이다.

“은애가 정련을 좋아하여 나더러 중매를 서 달라고 하여 우리집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련의 할머니에게 들켜 은애는 담장을 기어올라 달아났다.” 하며 안소사가 떠벌리자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김양준이 김은애가 그럴 리 없다며 그녀와 결혼했는데, 그 뒤에도 안소사가 그러한 헛소문을 계속 퍼뜨리고 다녔다. 김은애는 결혼한 지 2년이나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간통했다는 모함을 받자 드디어 식칼을 들고 안소사를 찾아가 말했다.

“어제의 모함은 지난날보다도 심했다. 내가 너에게 뜻대로 분풀이를 하려고 한다.”

안소사는 은애에게 사과도 않고 오히려 찌를 테면 찔러 보라고 큰 소리 쳤고 이에 김은애는 안소사의 왼쪽 목구멍을 찔렀다. 그러나 안소사는 쓰러지지 않고 김은애의 칼을 쥔 팔을 잡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손을 빼고 오른쪽 목구멍도 찔렀다. 비로소 안소사가 쓰러졌고 김은애는 그녀를 찌를 때마다 꾸짖으면서 18번이나 찔렀다. 김은애의 나이는 18세였다.
이장이 관아에 달려가 고발하니 현감 박재순은 안소사의 시체를 검험했다. 현감이 김은애에게 연약한 여자로서 혼자 그렇게 안소사를 찌를 수 없으니 공모자를 대라고 다그쳤으나 그녀는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처녀가 모함을 받았느니 더렵혀지지 않았으나 더렵혀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안노파는 본래 창기로서 감히 처녀를 모함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죄인이 어찌 노파를 찌르기를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비록 어리석으나 일찍이 사람을 죽이면 관아에서 죽는다는 것을 들었으며 어제 안노파를 죽였으니 마땅히 사형 받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파는 이미 제가 죽였으므로 사람을 모함한 죄를 현감께서 물을 곳이 없습니다. 다만 원하는 것은 관아에서 최정련을 때려죽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만 혼자 모함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이 저를 도와 같이 찔렀겠습니까?”

항변하는 김은애의 말을 가상히 여긴 현감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관찰사 윤행원에게는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관찰사 윤행원은 공범을 찾을 수 없으니 김은애만 사형에 처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단지 최정련은 나이가 어린 데다 노파의 속임수로 잘못했으므로 불문에 붙이기로 했다.
정조 14년(1790)년, 대특사가 있어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를 기록해 올리게 하니 관찰사 윤시동은 김은애의 형을 감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왕이 대신들의 의견을 물으니 채제공(蔡濟恭)은 복수는 지극히 원통함에서 나온 일이지만 살인죄를 저질렀으니 정상을 참작하여 용서하도록 진언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조는 그녀를 사형에서 면하게 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은애는 이런 행동을 출가한 뒤에 해 냈으니 더욱 뛰어났다. 그녀를 석방하라. 또한 사건의 줄거리 및 내가 결재해서 내려 준 내용을 적어 도내에 반포하라. 사람으로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없고 기개와 절조가 없는 자는 짐승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하면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도 김은애 사건을 살펴보고 도둑의 누명을 쓰면 끝내 벗을 수 있으나 간음에 대한 모함은 씻기 어렵다는 속담을 들어, 집안 깊숙한 곳에서의 남녀간의 일을 알기는 어려워 김은애가 진짜 간통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특히 김은애가 안소사를 칼로 찌른 정황을 보아 김은애와 최정련 사이에 실제 간통이 있었다면 그렇게 통쾌하게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김은애가 안소사를 살해한 것은 정당하다는 설명이다. 조선 시대에 무고를 받은 사람이 살인을 해도 구제를 받을 만큼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서산군수가 서울로 도망간 임충호를 잡아들이기 위해 그의 인상착의를 담은 '용파'를 작성하여 방방곳곳에 돌려 체포를 독려했다는 점이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몽타주 같은 것이지만 현대와 같이 그림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글로 사람의 생김새 등을 묘사했다. 키와 얼굴빛, 머리 모양과 그 사람만의 특이한 생김새, 주로 얼굴이나 팔 등의 상처 부위 등을 기록해 포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증수무원록언해』에서도 검시할 경우 반드시 ‘생전에 팔ㆍ다리가 부러졌는지, 곱사등이였는지, 조막손이나 절름발이였는지, 대머리였는지, 푸르며 검붉으며 검은지, 사마귀나 혹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병의 상처나 문신, 뜸을 뜬 자국, 옴이나 버짐, 종기나 뾰두라지 창질(매독) 등의 흔적이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적었다.
용파에 적힌 기록만으로 어떻게 범인들을 검거할 수 있겠느냐고 묻겠지만 당대의 범인 검거율은 생각보다 높았다. 조선시대 과학수사진이 범인의 신상 정보 등을 비롯한 첨단 수사 정보를 활용하고 있다는 자체를 범인들이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종호 박사는 고대 건축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프랑스 문부성 주최 우수 논문 제출상을 수상했으며,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IST) 등에서 겸임교수로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에도 해박한 지식을 보유한 이종호 박사는 우리 유산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대중들에게 알리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번에 시리즈로 싣게 된 ‘조선시대의 과학수사’ 역시 이려한 그의 노력의 한 부문을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풀어놓은 것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현대과학으로 보는 한국의 유산 21가지」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한국의 과학자들」「피라미드 과학」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