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조선의 공직자들 '절친'의 효행약속

마당쇠행정사 2009. 11. 4. 09:33

 

 

이한우 기자의 역사 읽기·조선의 공직자들 .

‘절친’의효행약속

종 8년(1408)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어변갑(魚變甲· 1380~1434)은

나이는 두 살 아래였지만 자기보다

6 년 앞서 문과에 급제한 신장(申檣·1382~1433)과 

아주가깝게지냈다. 초급관리시절 두사람은 “열심히임금께충

성을 다해 명성을 얻게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노부모를 봉양하

자”고 약속했다. 먼저 어변갑의 관직 진출 및 승진 과정을 보자. 어변갑은

1408년 3월 급제하자마자 장원급제자의 관례에 따라 교서관

(校書館)의 종6품 직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됐고 이듬해 사간원

(司諫院)의 정6품직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됐다.

 

한편6년앞서 종9품직에서 출발한 신장은 태종 9년 정5품 예조정랑에 올랐

으니 두 사람의 관직 차이는 속된 말로‘한 끗 차이’였다. 

그만큼 장원급제의 프리미엄은 컸다.

성품이 곧았던 어변갑은 태종 10년 공신(功臣)을 직접 겨냥

한 상소를 올렸다가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 태종 때 내내 그

의 승진은 정체 상태였다. 

태종 13년에야 겨우 사간원 헌납(정5품)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 2년(1420)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어변갑의 삶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집현전은 좌의정 박은이 주도적으로

설치를 건의한 것으로 3월 16일 창설 당시 박은이 최고책임자

인 영사(領事)였고 신장은 종3품 직제학(直提學), 어변갑은 종

4품 응교(應敎)에 제수됐다.

이때부터 어변갑은 세종의 큰사랑을 받게되지만 그의마음

은 이미 조정을 떠나 부모님이 계신 고향 창녕에 가 있었다. 

결국 집현전에 들어온 지 4년 후인 세종 6년(1424)) 집현전 직제

학으로 있던 어변갑은 허리 아래쪽에 피부병이 생기자 그것을

핑계로 직제학을 내놓았다.

그런이유라도없었다면 세종이

직을받아들일리없었기때문이다. 결국세종도어변갑의

간절한 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세종이 어변갑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그의 사직 8년 후인 세

종14년 5월 17일자 실록의기사가 증언하고있다. 이때 세종은

특별히 어변갑을 정2품에 해당하는 사간원 지사(知事)로 임명

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어변갑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사직하고 돌아가 어머니

를 봉양한 지가 오래이므로, 임금이 그의 효행(孝行)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특히 이벼슬을 준것이었으나 또한

사퇴하고 취임(就任)하지 아니하였다.’

반면 어변갑과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신장은 귀향을 

결단하지 못했다.

참판(종2품)에까지 오르게 되는 신장은 세종 11년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에서 근무하던 어변갑의 아들 어효첨(魚

孝瞻·1405~1475)을 만날 때마다 부끄러워해야 했다.“ 내가

자네아버지와 함께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남몰래 서로

약속하였는데 자네 아버지는 결단성 있게 돌아갔으나

나 혼자 서 언약을 저버렸으니 매우 부끄럽네.”

하지만 약속실행의 이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변갑과

신장은 훗날 자신들보다 더 유명하게되는자식 및 손자들을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참판 벼슬 거절하고 어변갑 귀향…각각 정승아들 둬

어효첨은 1449년 아버지의 마지막 관직이었던 직제학을 거

쳐 세조 9년 이조판서에 오르고 성종 5년에는 중추부 판사(종1

품)를 지낸다. 어효첨의 두 아들 어세겸(魚世謙·1430~1500)

과  어세공(魚世恭·1432~1486)도 크게 출세를 한다.

어세겸은 강직한 성품과 탁월한 업무능력으로 성종 때

 핵심요직을 두루 거쳐 마침내 아직 폭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연산군초 좌의정에까지 오르게 된다.

 세조 2년(1456) 형 세겸과 나란히 문과에 급제할 만큼 출중했던

어세공도 세조, 성종 시대 때 고 속승진을 거듭했으나

 형보다 14년이나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 써 정승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유명하기로는 신장의 아들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어변갑의 아들 어효첨 보다 훨씬 앞선다.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신숙주는 유명한 논란의 인물이지만 당

시로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크게 현달했다. 세조와 한

명회를 돕는편에 서서 세조와 성종 정권의 안정에 누구보다

크게 기여해 마침내 영의정에 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신숙주는

현달한 만큼이나 욕도 많이 먹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