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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는 위대한 바보였다.

마당쇠행정사 2010. 4. 22. 21:23

박정희는 위대한 바보였다.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 박 정권 타도의 시위꾼으로 ...

필자는 충청북도 월악산 끝자락에 위치한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혈혈단신으로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곤궁한 시골살림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서울금호동 산꼭대기 삭, 월세 단칸방을 얻어 형님과 함께 자취하며 부모형제들로부터 다소 간의 도움은 받았지만 고학이나 다름없는 생활로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학교졸업 후 경희대학교에 입학했다.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일조하리라는 청운의 뜻을 품고 법대를 택했다.

 

그 때가 박정희시대였다. 길거리에서 민주쟁취와 박 정권타도를 외치는 선, 후배들을 규합하여 학생시위대를 이끌게 되었으며 끝내는 학교로부터 제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운동권학생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양심]으로 통하던 동교동과도 자연스럽게 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새내기 대학생으로서 민주주의와 독재정치에 대한 개념정리도 부족한 상태였다. 단지 장발을 단속하고 시위대 해산을 위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독재정치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러나 모 장소에서 “정치인에겐 재물에 대해선 내 것이란 없다. 모든 것이 우리(국가) 것이다.”라고 강조하던 김대중 씨의 발언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진정한 애국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농촌출신의 가난한 대학생에게 동교동은 정신적 해방구였고 김대중은 내 가슴의 별이었다. 별을 바라보고 가다가 수렁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조력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 후부터 학생시위대의 선봉에 나섰다. 박정희시대를 종식시켜야 민주화의 보루인 동교동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녔다. 한마디로 미쳤었다. 집시법위반으로 현장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사상범으로 몰려 지명 수배자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수차례 법정에 불려 가기도하고 영장 없이 구금, 연행되기도 했다. 김대중 씨의 지근거리에서 정치적 허드렛일까지 거들었다. 민주 연합 청년동지회(약칭: 연청)조직 회장직을 11년간 역임하며 그의 대선활동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송창달은 박정희에겐 끝까지 피곤한 존재였고 천하에 둘도 없이 고약하게 굴던 놈이었다. 그가 운명하던 10.26 그 날도 나는 좋아서 만세까지 불렀으니 말이다. 혈기왕성하던 청년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순수에 목말랐을 뿐, 좌파청년은 아니었다.

지난 날 아스팔트위에서 함께 뒹굴던 동지들 중에는 필자를 향해 [변절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의 내가 소위 말하는 수구꼴통으로 변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 젊은 시절의 활동은 진보적 사고와 좌파적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태생적 토양자체가 좌파적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순수에 목말랐을 뿐이다. 욕심 없는 열정 하나로 순수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 동교동과의 인연을 중도에 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김대중 씨가 언젠가는 대권획득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과 잦은 정치적 식언에 실망도 컸거니와 설령 김대중 씨가 권력을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정체성이 모호한 그 정권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애증이 남아있어 이 지면을 통해 한마디 소회를 피력한다면 김대중 씨는 대통령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민주화의 대부요, 평화통일의 메신저요, 동서화합의 해결사로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만인으로부터 추앙받는 지도자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견해다.

 

박정희는 참으로 위대한 바보였다.

[월간 박정희]는 필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박 정권타도에 선봉적 역할을 했던 당신이 왜 박정희를 긍정하는 보수로 돌아 섰느냐고 말이다.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란 고사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집안이 궁박한 지경에 이르면 어진아내가 생각난다고 했듯이 국난이 닥치면 능력 있는 관리자가 그리워진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36년 간 일제에게 고혈을 빨려 빈혈증으로 쓰러졌던 백성들을 살려내고 6.25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나라를 장대하게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박정희가 아닌가? 이를 어떻게 부정하란 말인가?

 

박정희는 자기 개인보다는 오직 국익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비근한 예로 대국토개발사업인 경부고속도로건설을 들 수 있다. 당시는 국가재정도 열악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 남짓한 최빈국이었다. 430억 원의 공사비로 428Km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3년 안에 건설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 세계은행도 사업추진에 따른 차관지원을 꺼렸고 집권당인 공화당에서 조차 신중론을 폈다. 야당은 언론과 합세하여 극렬히 반대를 했고 필자 또한 경부고속로건설 저지를 위해 길바닥에 수없이 드러눕기도 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해냈다.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건설사상 [가장 적은 비용]을 들여 [가장 짧은 시간]에 대 역작을 만들어 놓았다. 부족한 인건비 때문에 군(軍)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경멸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룩한 쾌거였다. 그 경부고속도로는 산업화의 혈맥이 되어 “대~한민국”의 국운을 상승시켜 놓았다. 오늘도 나는 박정희가 내 놓은 그 길을 달리고 있다. 뻔뻔스럽게도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말이다. 시위꾼들에게 그토록 부대끼면서도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그를 어찌 부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친김에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본다. 한 무기로비스트가 박정희를 찾아와 100만 달러 묶음의 돈다발 한 개를 내 놓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즉석에서 “우리는 돈보다도 무기가 더 필요하다. 그 돈 대신 총으로 달라.”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금전적으로 사사로운 거래를 용납하지 않았던 깨끗함은 물론이거니와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의 기치를 내걸고 혈투를 벌이던 그 처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구라도 국가 최고위공직자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화가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정희 이후에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의 꼬락서니를 보자. 두 전직 대통령은 비자금에 연루되어 줄줄이 사법처리 된바 있다. 그 잘난 민주투사출신 두 대통령은 국정운영 실패란 과오 때문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다. 직전 대통령과 그 가족 및 수족들은 떳떳치 못한 돈을 받아 챙긴 것이 들통 나 패가망신을 당하고 있다. 서민들은 동전 몇 닢에도 벌벌 떠는 판국인데 국가 최고 권부에 앉았던 물건들은 [억(億)]이 뉘 집 강아지 이름인 줄 안다. 국가발전이란 명분하에 민주주의의 본질을 다소 제한한 것은 옥에 티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박정희만한 인물은 없다고 힘주어 단언한다.

 

생각해 보면 박정희는 참 바보였다. 만인지상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막걸리만 고집하던 바보였다. 아내마저도 지켜주지 못하고 비명에 가게 한 바보였다. 사랑하는 자식들도 끝까지 챙겨주지 못한 바보였다. 자신보다 국가를 고집한 바보였다. 박정희야 말로 [나] 아닌 [우리]를 걱정하던 바보였다. “잘 살아 보세!”밖에 모르던 바보였다. 개나 걸이나 세우고 있는 그 흔한 기념관 하나 얻지 못한 불쌍한 바보였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바보였다. 비록 자신이 이룩해 놓은 풍요를 향유하지 못하고 갔지만 후손을 위해 번영의 터를 다져 준 위대한 바보였다.

 

저승에 가서라도 박정희에게 용서를 구할 터...

대통령의 지위란 엄정한 것이다. 국가원수로서의 지위, 행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 국가수호자로서의 지위 등 엄격하고 공정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그 엄정한 책임을 훌륭히 소화해 낸 지도자라고 평가하고 싶다. 국내외적으로 국가원수로서의 권위를 공고히 다졌고 행정부수반으로서 혁혁한 공도 세웠다. 특히 국가수호자로서 국가정체성확립과 물샐 틈 없는 안보체제를 구축해 놓은 유비무환의 대통령이었다. 사람은 관 뚜껑이 닫히고 난 후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다고 했다. 박정희가 이룬 역사적 평가는 평가로써 끝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가치와 자산으로 승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제 필자는 칠순을 내다보는 나이다. 돌이켜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상만을 좇던 청년시절의 열정은 객기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회한(悔恨)만 남아있을 뿐이다. 철들자 망령이라더니 내가 그 짝이 된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고백하고 싶다. 박정희는 생전에 자기를 괴롭히던 세력들을 향하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했다. 필자는 연전(年前)에 동작동 국립묘지의 박정희 무덤을 찾아 간 적이 있다. 그의 비돌 앞에서 눈물로 화해를 청했다. 훗날 저승에 가서 박정희를 만나면 용서도 구할 참이다. 그리고 간청도 해볼 생각이다. 현존하는 이 땅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지혜를 좀 주라고 말이다.

 

기축년 5월

그린비전코리아 중앙회장 송 창 달

 

송창달 회장 약력

 

1966  경희대 법과대학 졸업

1964  6.3동지회 창립 발기인(경희대 대표)

1964  6.3학생시위로 서대문교도소 투옥

1965  한일회담 비준반대 시위주동혐의로 문교부 지명제적

1969  3선개헌반대. 4.19, 6.3 범 청년 민주수호투쟁위 기획위원장

        신민당 중앙 상무위원, 민주전선(당 기관지)편집부장

1970  신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 민정비서

1972  10월유신으로 정치활동중단

1974  민주투옥 인사위원회 대표위원, 정치문화연구소 사무국장

1975  민주회복국민회의 조직위원

1978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창립(1987년까지 중앙회장 역임)

1980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세칭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주모자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되어 구금, 수난 당함.

        정치활동금지법에 의거 정치활동금지.

1983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에 참여. 기획실장으로 취임(동교동계)

1985  정치활동해금법에 의거 2차 해금

1986  평민당 창당준비조직위원 및 제천, 충주지구당 위원장

1987  평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 특별보좌역

1993  통일국민청년회의 중앙회장

1994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은평구 고문

1996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

2002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 특별보좌역

2007  그린비젼코리아 회장

        (사)6.3동지회 이사

        (사)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

 

 

 

 

 

 

출처 : 박정희 바로 알리기 국민모임
글쓴이 : 김동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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