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나, 판사요” “그래서요?”

마당쇠행정사 2011. 5. 14. 22:06

 

“나, 판사요” “그래서요?” 민경욱 KBS 9시 뉴스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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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던 지난 2005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들의 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저녁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나 한 편 보자고 약속을 했는데 아침 리포트 제작 때문에 사무실에서 꾸물대다가 약속 시간에 좀 늦게 됐다. 시간은 늦었고, 약속한 극장의 위치도 모르고 해서 약간 서두르면서 운전을 했다.

KBS 워싱턴 지국이 입주해 있는 내셔날 프레스 빌딩(National Press Building)을 빠져나와서 백악관 옆길을 돌아설 때였다. 원래 우측 차선 한 차선만 우회전이 가능한 곳이었는데 차가 밀리는 바람에 왼쪽 차선을 타고 오다가 우회전 금지를 무시하고 그냥 운전대를 꺾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뒤차가 "삐익"하는 이상한 경고음을 내기에 돌아보니 바로 경찰차였다.

내 머리 속은 온통 시간이 늦어서 영화를 못 보게 될 가족들의 모습으로 가득 찼었기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뒤차에 대고 미안하다는 뜻으로 손을 한 번 들어주고 그냥 내 갈 길을 갈 요량으로 운전을 계속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룸미러로 뒤를 살펴보니 경찰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하는 생각에 한 번 차선을 바꿔보았더니 경찰차도 차선을 바꾸는 게 아닌가! 이거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 따라오던 경찰차가 경광등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걸렸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지체 없이 백악관 정문 앞 갓길로 차를 댔다. 운전면허 시험 볼 때 배운 대로 두 손을 운전대에 얌전히 올린 채로 기다리고 있었더니, 육중한 몸집의 젊은 경찰관이 허리에 찬 권총을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운전대 쪽으로 접근했다. 나는 손을 가지런히 운전대 위에 올린 채 표정과 고갯짓으로 창문을 내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경찰이 손으로 창문을 내리라는 표시를 했다.

“뭘 잘못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예, 알고말고요... 하지만 혹시 변명을 좀 해도 된다면 오늘이 제 아들의 생일입니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좀 늦어서 서두르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운전 면허증과 보험 가입 증명서를 보여주십시오.”

내가 약간 긴장을 하는 바람에 운전면허증을 꺼낸다는 게 신용카드를 꺼내줄 뻔했다. 아, 영화 구경은 커녕 벌점에 벌금까지 물게 생겼구나, 하고 낙담을 하고 있었는데, 면허증과 보험증서를 갖고 자기 차로 돌아갔던 경찰이 잠시 뒤에 돌아오는 게 사이드미러로 보였다.

“Mr. Min, drive more carefully from next time. And say ‘Happy Birthday’ to your son for me.”

“민 선생님, 다음부터는 좀 더 주의 깊게 운전하십시오. 그리고 아드님께 제 대신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주십시오.”

법규 위반 사례가 중대하지 않고 또 아들의 생일이라는 말에 그 기분을 망치지 말자는 배려를 했던 것이었다. 자칫하면 어두워질 뻔했던 아들의 생일 저녁 분위기가 마냥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그 날 식구들과 함께 마다가스카르라는 만화영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했다.

그 다음날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 뉴스를 듣게 됐는데 경찰과 판사에 관한 기사였다. 한 여자가 과속으로 경찰에 단속된 다음에 자신이 판사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사건을 경찰이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과속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여자가 자신이 판사라는 사실을 알렸는데 그것이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압력이라고 느낀 그 경찰관은 곧바로 자신의 상관에게 전화를 했고, 그 상관은 판사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 얘기다. 그 판사는 과속 사실 때문에 입건될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압력의 수단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는지를 구금 상태에서 조사 받고 있었다.

경찰과 사법부라는 두 권력기관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견제가 느껴지는 동시에 아들의 생일날 가족 행사에 늦을까봐 서두르다 사소한 교통위반을 한 소시민에게는 마냥 너그럽고, 판사라는 권력에 대해서는 강하게 맞부딪치는 미국 경찰의 당당한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었다.

한국의 한 판사가 지하철 성추행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남녀 경찰관 두 명이 한 조가 된 지하철 수사대가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를 목격했다. 이 남자는 지하철을 타지 않고 주위를 살피며 노출이 많은 젊은 여성이 등장하자 자꾸 줄을 바꾸며 그 여성을 따라 지하철에 탔다. 경찰관들이 그 뒤를 따라갔는데 이 남성이 짧은 반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 뒤로 접근해 성추행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경찰은 조용히 여성에게 접근해서 “지금 성추행을 당하고 있습니까?”라는 문자가 찍힌 휴대전화를 보여줬고, 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성추행범이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순간이었다.

그 남성, 경찰에 붙잡히고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자 신분증 대신 서울고등법원 판사 명함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 때 경찰관의 머릿속에는 별별 복잡한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옛날 같으면 그런 사건 가져온 후배들을 “개념이 없다”며 꾸지람을 하고 판사를 훈방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찰관은 판사라면 법을 더 잘 지켜야 하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갖고 흔들림 없이 조사를 마쳤다고 한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여성을 성추행한 그 판사는 점심때부터 나온 성추행 판사를 다룬 뉴스를 들어야 했고, 고심 끝에 그날 오후 사표를 제출했으며 그 사표는 곧바로 대법원장에 의해 수리됐다. 6년 전 미국에서 경험했던 경찰과 판사의 팽팽한 긴장 같은 것을 이제 한국에서도 보게 되는 모양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할 때 지위를 이용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려는 그 누구의 기도도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좋은 예를 보는 것 같아 기쁘다.
| 민경욱 KBS 9시 뉴스 앵커 | 등록일 : 201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