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이야기

박정희 장군과 나(제9대 공군참모총장 장지량 장군)

마당쇠행정사 2009. 9. 25. 11:31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장지량 구술 / 이계홍 정리/도서출판 이미지북/\13,000

-P243 ~ P255-발췌


박정희 장군과 나

 

1960년 4.19와 함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권력이 바뀌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자유가 넘쳐나니 누구나 자유의 이름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했다.

 이때 시민과 학생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군인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다. 장군 별(★)판이 부착된 지프에 돌을 던지는가 하면, 군인을 향해 삿대질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별의별 시위가 일상처럼 벌어졌고, 민주당 정권의 신.구파 싸움으로 국방장관이 2주일에 한 번씩 바뀔 정도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사회가 불안 스럽게 부풀러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1960년 9월 나는 정규 교육의 일환으로 국방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교하자마자 국방대학원 학생회장인 오 모 장군 등 장성 몇 명이 부정선거연루혐의로 체포, 구속 되었다.

이래저래 군의  사기가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종전과 다름없이 학교에 가자 교내가 크게 술렁였다.

수업도 중단된 채 모두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군사 혁명이 났다는 것이다. 3권을 행사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족되고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부의장 명의의 혁명 공약이 라디오를 타고 군가처럼 매시간 방송 되었다.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 불안한 나날이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암담해 보였는데 마침내 어느 한 곳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같은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다니는데 5월 22일 최고회의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그 당시 최고회의 인적 구성원은 육군이 거의 장악했고, 해군과 공군은 참모총장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최고회의에 들어가서야 5.16의 핵심 인물이 박정희 부의장인 것을 알았다.

장도영 의장은 공식 행사에만 참석할 뿐 실질적인 권력행사는 박부의장이 하고 있었다.

 나는 박정희 부의장 앞에 섰다. 부의장실에는 큰 책상이 하나 중앙에 놓여 있고 책상과는 어울리지 않은 허술한 의자에 까무잡잡하고 단단하게 생긴 박정희 부의장이 야전잠바를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하면 실내를 서성거렸다. 그런 그에게서 강한 카리스마가 풍긴다는 것을 느꼈다. 박정희 부의장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자네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했어”

 

임명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임명했다는 통고를 했다는 통고를 했다.

나는 순간 옷을 벗기는가 하는 걱정과 함께 대한중석 사장이란 직책이 전혀 생뚱맞아

 

‘네?“하고 반문했다.

 

“큰 돈이 되는 회사가 적자투성이란 말이야. 너도나도 빼 먹고 있으니 복마전이야. 그러니 자네가 가서 제대로 접수해”

 

그야말로 군대 용어로 접수하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박 부의장은 화난 듯이 한 일 자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언제나 결의에 차면 입을 한 일 자로 닫는 습관이 있었다.

 

박 부의장이 특별히 나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그를 일본 육사 생도 시절 만났다.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로 선발되어 57기로 입교했으니 60기인 나와 마주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본 육사에서의 만남보다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더 가깝게 지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1947년 경비사관학교 생도 시절이다.

2중대원이었던 나는 1중대장을 맡고 있던 박정희 대위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실천 중심이지만 이론에 해박하고 생도들을 이끄는 다부진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크게 서로를 의식하는 입장은 아니고, 일본 육사 후배라는 점 때문에 나를 세밀히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위와 가깝게 만났던 것은 1948년 어느 날 일본 육사2년 선배인 최복수 대위(6.25때 전사)의 아들 생일잔치에 초대되었을 때다.

나는 이 자리에 미리 와 있던 박정희 대위로부터 의외로 따뜻한 시선을 받았다.

최 대위는 일본 육사 본과를 졸업한 뒤 나카노 학교, 즉 일본의 CIA격인 정보 학교를 나온 정보통이었다.

육사 정예 졸업생 중 극히 일부만 선발되어 입교하는 학교였다.

특히 한국인은 거의 선발하지 않는 특수 학교인데 최복수는 이 학교를 나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김포비행장 근처에 정보 학교를 창설해 교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러니 정보 계통과 관련이 있는 박정희 대위와 가까이 지냈으며 최복수 대위를 따르던 나도 이 때부터 박 대위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이날 생일 잔치에 초대된 사람은 김정렬, 박정희.정래혁 그리고 나를 비롯해 5~6명이였다.일본 육사 선후배라는 인연이 있었지만 박정희 대위는 내가 항공사관학교 출신이라 걸 알고 대단히 반가워하며 김정렬 대령에게 당부의 말까지 아끼지 않았다.

 

“선배님 장지량 같은 후배는 조국의 항공을 위해서도 잘 길러야 합니다. 전도가 있는 후배입니다.”

 

나는 이런 인연을 생각하며 박정희 장군 앞에 서 있지만 대한중석 사장은 아무래도 머리에 맞지 않는 관을 쓰는 것처럼 어색하고 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 장군에게 겸양으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능력이 없다는 뜻으로 말했다.

“선배님 아시다시피 저는 비행기 타고 전쟁하는 조종사인데 중석회사는 땅 속을 파는 일 아닙니까. 하늘을 날아 다니는 사람이 땅 속 생리를 알 수가 없지요. 적임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봐 쓸데없는 소리 마라! 내가 혁명이 무엇인 줄 알고 했냐? 나라꼴이 엉망이니까 나선거야. 자네 역시 죽을 각오로 해 봐. 하면 돼.”

 

그 때서야 나는 박장군의 뜻을 알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

 

나는 최고회의를 나오면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어떻게 개척할까를 생각하니 불안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그 때 내 나이 37세 박정희 장군 44세였다. 박 장군이나 나나 일에 있어서는 물불 안가리는 나이였다.

 박정희 장군은 이런 젊은 혈기를 무기로 죽을 각오로 나서라고 하지 않았는가. 결전 항전의 자세로 나가면 막힌 길도 뚫고 전문성도 길러지고 회사를 정상화시킨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박정희 장군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탁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혁명은 했는데 사람이 부족해서 나를 차출한 것인가.

일본 육사 출신 중 현역에 있는 사람이 20명(1기부터 61기까지 총 인원은 114명)도 안 되고, 그 중 내가 젊기 때문에 (60기) 의욕이 넘칠 것으로 보고 발탁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주변적 요인은 될 수 있어서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때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상공부 장관에 정래혁선배가 있었다. 일본육사 2년 선배에다 광주 서중 선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앞일도 답답한 데다 발탁 배경이 궁금해 찾았더니, 과묵한 정 선배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를 천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그런 인사문제데 관한 한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대한중석 사장으로 부임하자 회사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동안 관심이 없어서 신문보도도 읽어보지 않아지만 ‘동식 사건’이라고 하여 어마어마한 부정 사건이 저질러져 있었다.

 

일본의 동경식품주식회사에 우리 중석을 수출 했는데 100만 달러어치를 팔고도 6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고 속이고 나머지를 회사 간부들이 착복한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소득은 100달러 미만이였으니 40만 달러라면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대한중석 채석장이 있는 강원도 상동광산 창고에 가 보니 자동차 체인을 10년분이나 야적해 놓고 있었다.

나는 공군 창고 관리 요원 10명을 차출해 물품 점검을 했다.

그리고 예편한 부하 10여 명도 데려왔다.

그들은 미 공군에서 보급.회계.감리 시스템을 습득하고 돌아온 대단히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부하들의 조사 결과 온갖 부정한 물품 구입과 직원이 과대 채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소를 차려 놓고는 전혀 맞지 않는 상업학교 출신을 광석 전문 연구원이라고 앉혀 놓았으며, 장관이나 국회의원, 중앙관서인사 군수 추천이랍시고 들어온 직원이 30%나 되었다.

 

 입금된 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였다.

자동차 체인을 10년 분이나 비축한 것은 그 지역 국회의원이 체인 도매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고에 쌓여 방치된 자재 썩어가는 식품 분말 우유가 얼마나 지났는지 돌처럼 굳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망하지 않고 돌아 간 것은 돌을 캐다가 수출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식의 회사였던 것이다.

산에 널러 있는 돌을 쪼개 팔아먹으니 이익이 생기지 않을수 없고, 누구나 착복해도 최소한 본전이라는 역설이 나오는 것이다.


 

대한중석의 12억 흑자

 

나는 매일 군복(공군준장)을 입고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 현관 청소부터 시작했다.

그래야 긴장감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규율을 엄하게 하면서 기존의 조직 체계를 확 쓸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행동의 표시였다.

그리고 인적 청산을 단행했다. 쓸데없는 인력이 남아돌아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와 작업 분위기를 저하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슬림화를 대대적으로 단행한 것이다.

‘동식 사건’으로 사장이 구속되고 현역군인과 미국식 교육을 받은 정예 공군 예비역들이 들어 와 업무 처리를 해 나갔다.

그런데 그해 12월 결산에서 생전 보도 듣지도 못한 12억 원이라는 흑자를 냈다.  당시 12억 원은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에 해당된다.

그래서 누구나 벌린 입을 다물줄 몰랐다.

 

이 같은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장도영 의장의 일련의 사건으로 물러나고 박장군이 후임이 됐음)으로부터 1962년  1월 중순 친서가 날아왔다.

‘(장지량)장군께서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 후 회사 관리와 운영에 대개혁을 단행하여 작년도 후반기에 12억원이라는 이익을 가져오게 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경하할 일이며 장군의 노고와 업적에 대하여 심심한 격려와 치하를 드리는 바입니다....’로 시작된 장문의 친서는 나를 비롯해 전 직원들에게 한껏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때 상급 기관인 상공부에서 공군중령 출신인 최형섭(전 과기처 장관)을 찾으라는 연락이 왔다.  상공부 광무국장 적임자를 찾는 중이었다.

 최형섭은 군을 예편한 뒤 미국으로 유학해 최고의 광물학 박사가 되어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서고 있었는데 5.16이후 자취를 감춰 버렸다. 

광물학자는 대한중석과도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공군 시절 알고 지냈던 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한 지인으로부터 그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다.

 

나는 공군 출신 수행 비서를 대동하고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원무과에 들러 입원 환자 명단을 살피고 병동을 일일이 점검했지만 입원한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허탕을 치고 돌아오려는데 눈치 빠른 비서관이 복도 끝에서 마스크를 한 채 서성거리고 있는 환자를 발견하고 나를 그 쪽으로 이끌었다.

 

“사장님, 어쩐지 예감이 이상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힐끗 보다가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급히 그 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최형섭이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채 우리를 피해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최 형, 여기서 뭐 하시오?”

 내가 부르자 최가 움찔 놀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5.16을 지지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군 출신 인재를 찾자 병원에 가명으로 입원해 피해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다방으로 이끌고 와 사업의 자초지종을 털어 놓고 간곡히 당부했다.

 

“최 형, 참여해서 국가를 일으켜야지. 그래서 국가재건 아닌가?”

“아니오, 군에 관여하면 당하게 돼 있소”

“아니 결코 그렇지 않소. 박충훈 공군 준장도 상공부에서 일하고 계신다니까”

 

나는 버티는 그를 반 강제적으로 비서와 함께 허리춤을 잡아 이끌고 상공부로 데리고 갔다. 정래혁 장관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광무국장 임명장을 수여했다.

임명장을 수여하면 일단 빠져 나갈 구멍 차단되는 것이다.

임명장을 받아 놓고 뒷소리 한다고 엄포를 놓으면 그가 아무리 강심장이고 해도 꼼짝 못하는 것이다. 그 때는 엄중한 군사 정부 시절이 아닌가

상공부와 대한중석 사무실은 명동 입구에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는 광물학 박사답게 중석이나 석탄에 많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유명부실한 연구소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조금만 더 연구하면 돈을 크게 벌 수 있는데 이것을 외면사하고 타성에 젖어 돌멩이만 쪼개 팔아먹는 것으로 안주하고 있는 정신적 해이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강당만한 초호화 사장실을 3분의 1로 줄이고 5층 전체를 치운뒤 대한 중석 금속 연구소를 설립해 6명의 박사급 연구원과 여러 명의 직원을 배치했다.

그리고 나는 연구원들에게 격려를 했다.

 

“연구 기간이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만라도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을 장악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최형섭 광무국장은 내 야심을 이해하고 내손을 잡아 주었다.

 

“이제야 과학자들이 일할 기분이 난다.”

 

이것이 훗날 홍릉의 KIST(한국과학기술원)의 모체가 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알았겠는가.

                    ------중략----

이후 박의장의 요청으로 미국 존F케네디 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개설 지원의사를 약속했고 초대원장에는 최형섭박사가 임명된다.

이에 영향력을 입은 포항제철 초기 기술인력은 내가 다 제공했다라고 장지량 장군은 박태준회장한테 농담을 했다고 한다.